한결같은 소불고기는 엄마를 닮았다.
"야 너는 다시 어린 시절(초등학생)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갈 거야?"
며칠전 친구가 물었다. 뜬금없지만 신선한 질문이었다. 어린 시절이라.. 단소 소리를 내지 못해 교실에서 나머지 수업을 받았던 것, 수학 모의평가에서 4점을 받아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던 것, 일주일에 한 번은 끙끙 대며 파지를 들고 가야 했던 것들이 떠올라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두 기억하기 싫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친구들과 햄버거집에서 생일파티를 하며 감자튀김을 맘껏 먹기도 했고, 여름이 되면 물총 싸움, 겨울이 되면 눈싸움을 했고, 글짓기상도 많이 받고, 물로켓도 만들던 일도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년 내내 운동회 때마다 먹었던 엄마의 소불고기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운동장에 앉아 엄마표 소불고기를 먹고 싶다.
광활한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으쌰 으쌰 소리를 지르고, 달리고, 박을 터트리고, 훌라후프를 돌렸던 날, 운동회.
나는 3학년 때부터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반 계주 대표로 활동했다. 4학년 때는 팔이 길다는 이유로 농구대회에 나갔다. 날이 갈수록 내 키와 팔은 점점 새롭게 진화했는데, 매 운동회 때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엄마가 준비해 온 도시락 반찬이었다.
간장으로 양념을 한 엄마표 소불고기는 6년 내내 운동회 도시락 메뉴였다. 소풍에는 김밥이라는 공식처럼 엄마에게 운동회는 소불고기라는 공식이 있었다.
돗자리와 자주색 삼단 도시락통을 들고 동생 손을 잡고 학교에 도착한 엄마는 항상 후문 쪽 공터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날도 그랬다. 내 마지막 초등학교 운동회의 점심은 무엇일지 괜한 설렘을 안고 후문으로 냅다 뛰었다. 익숙한 자주색 도시락통과, 이제는 많이 벗겨져버린 우리 집 은박 돗자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신을 벗고 앉아 엄마의 도시락 통문이 열리길 기대했다. 두구두구
아, 또 소불고기다. 엄마가 가장 자신 있는 메뉴라는 이유였다. 생각해보니 맞았다.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자주 하고, 좋아하는데 엄마도 그랬구나? 그 한마디에 6년 내내 엄마의 기복 없는 소불고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엄마표 소불고기를 입으로 넣었다. 오전 온종일 운동장을 달리며, 응원을 하느라 텁텁해진 입안에 달달한 고기가 안착했다. 오전의 수고를 덜어주는 듯 고기 곳곳에 깊게 밴 달콤함은 지친 입안 구석구석을 달래주었다. 평소 양파를 잘 먹지 않았음에도, 불고기와 함께 양념된 양파는 얼마나 맛있던지. 이게 다 엄마의 힘인가, 소고기의 힘인가 알 수 없었다.
엄마의 소불고기는 정말 음식점에서 돈 주고 사 먹는 것만큼 맛있었다. 땡볕에 30분을 기다린 후에 먹는다 해도, 이 집 맛있네 하며 끄덕일만한 맛. 아마 우리 집이 돈이 많았다면 엄마 이름을 걸고 불고기 기사식당을 차린 대도 잘 됐을 만큼 엄마의 소불고기는 가족 모두가 인정했다.
그렇게 맛있는 소불고기를 한동안은 잘 먹지 않았는데, 결혼을 한 후 친정집에 갈 때마다 또다시 상위에 올라왔다.오늘도? 또?라는 물음에도 엄마는 끄떡없다. "사위가 좋아하잖아"라는 말로 위장한 엄마의 한결같은 마음은 늘 한결같은 맛을 내는 소불고기를 닮았다.
나이가 드니 이전만큼 맛있게 못하겠다며 오늘도 소불고기 양념을 만드는 엄마의 손에는 살포시 주름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운동회 때 먹던 그 감격스러운 맛을 잊지 못했는데, 세월은 어느새 엄마의 손에 표식을 만들었다.
"엄마가 맨날 운동회 때마다 이거 만들어줬는데."
"그렇지, 그때가 좋았지. 그때는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힘들지가 않았는데.."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지만 모래바람이 휘날리고 호루라기 부는 소리가 시끄럽게 섞인 운동장에 돗자리를 깔고 소불고기를 먹던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나를 기분좋게 간지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