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상추, 둘째는 수선화, 셋째는 백합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오후 12시 30분쯔으음, 우렁찬 울음으로 아빠의 둘째 딸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건 바로 나! 아빠가 나를 안자마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을 느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무뚝뚝하지만 때로는 다정한 아빠의 그늘 아래 무럭무럭 자랐다. 그 후로, 아빠에게는 자식 한 놈이 추가되었고, 그렇게 아빠는 삼 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몇 주 전, 오랜만에 본가에 들러 언니, 동생과 사이좋게 떡볶이를 먹을 때였다. 그날따라 티브이 윗 쪽, 거실 벽에 자리 잡은 결혼식 사진에 눈이 갔다. 액자 속에 들어있는 다섯 명의 얼굴이 묘하게 닮아있었다. 가족은 가족이구나, 역시 핏줄은 핏줄이었다. 그중에서 아빠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인자한 부처의 미소를 장착한 아빠의 얼굴에서, 공약이행률 99%인 프로 정치인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런 아빠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다 언니에게 물었다.
"아니 근데, 아빠 대학 어디 나왔는지 알아?"
"ㅇㅇ대 아냐?"
"아냐, 국립대 아니고 사립 대랬는데?"
"그럼 ㅇㅇㅇ아니야? 모르겠다."
35살 첫째, 33살 둘째, 그리고 27살 막내는 모두 정답을 알지 못했다. 그래, 환갑 넘은 아빠의 대학 이름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며, 대학을 모른다고 매정한 자식은 아니지 않냐며, 우리는 서둘러 결론을 맺었다.
"저거나 봐, 아빠 요즘 저거에 빠졌어"
그때, 우리 집에서 가장 똑똑하나, 가장 무뚝뚝한 언니가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제야 보이는 베란다 상황.
그곳에는 아빠의 작은 텃밭이 있었다. 베란다의 한 편이 온통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작년, 방울토마토를 키워본 적이 있던 나는 경이로운 생명력에 감탄을 한 전적이 있었는데, 아빠의 텃밭은 정말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우와 아아 소리를 내며 감탄을 하다 보니, 푸릇푸릇 싱싱하게 자란 상추 위로 아빠의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언니 말에 의하면, 아빠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베란다로 달려가고, 주말에는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 물을 주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고 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는 아빠의 상추 덕분에 이렇게나 많은 상추를 단기간에 먹은 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언니. 언니의 말을 듣다 보니, 슬슬 궁금해졌다. 아...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뭐지?
아빠는 나를 보자마자 상추 큰 것 좀 보았냐며, 베란다로 등을 떠밀었다. 마치 자식이 전국대회에 나가 큰상받은 걸 자랑하는 얼굴로, 호탕한 웃음을 지으면서.
상추를 시작으로, 아빠에게는 둘째 수선화, 그리고 셋째 백합이 생겼다. 나에게는 그저 푸릇푸릇한 풀떼기들이지만, 아빠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둘째 딸로서의 바람은, 아빠가 더 많은 자식들을 길렀으면 좋겠다. 30년 동안은 검은 머리의 자식 셋을 길러냈으니, 이제는 노랗고, 파랗고, 빨갛고, 푸르른 아빠만의 자식들을 만들어서 더 행복한 일이 많아지기를, 그로 인해 웃는 날이 늘어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