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미까레의 결은 우리 마음을 무척이나 닮았다.
얼마 전 역삼역 근처 아우어 베이커리에서 빨미까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냥 나왔다. 내가 알던 에르제의 빨미까레와는 크기, 결, 가격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비슷한 가격이지만 크기는 2배에 가까운 에르제의 빨미까레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빨미까레를 ‘초콜릿 바른 엄마손파이’라 부른다. 다른 누군가는 ‘고급진 엄마손파이’라고도 부른다. 나 또한 그 밀에 찬성한다.
처음 빨미까레를 보았을 때 빨미까레는 초콜릿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크기가 전부하고 생각했다. 초콜릿이 들어갔으니 응당 맛있는 건 당연할 거라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깔리바우트를 사용한 빨미까레라면 그 맛은 묵직할 테고 발로나를 사용한 빨미까레는 풍미가 매우 좋으리라 생각했다. 몸집이 큰 빨미까레에 현혹되어 에르제의 빨미까레를 선택했을지 모른다.
에르제는 크로와상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잠봉뵈르는 익히 유명하다. 크로와상과 샤워도우빵은 말할 것도 없다. 크로플도 인기다. 러스크와 구움 과자들도 언제나 인기다. 귀엽고 시선을 사로잡는 에르제의 다양한 빵들. 그 빵 중에서 사람들이 은근히 놓치는 과자가 바로 빨미까레다. 눈으로 보기에도 멋지고 맛스러운 크로롤과 코끼리같이 거대한 크로와상이 시선을 사로잡은 탓도 클 것이다.
버터를 사용하더라도 강력분을 사용하는 크로와상과 박력분을 사용하는 빨미까레는 그 감도가 사뭇 다르다. 그 맛과 결도 다르다. 크로와상이 바사락거리는 맛과 버터풍미로 한 겹 씩 베어무는 맛이라면? 빨미까레는 아삭하게 부서지면서 입안에 퍼지는 조각 같은 버터풍미가 일품이다. 파이라고 하기에는 빨미까레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맛이다. 버터의 고소함이 사뿐하게 퍼질 때쯤, 초콜릿의 부드러운 단맛이 버터만의 느끼함을 없앤다.
에르제의 빨미까레는 균형감이 좋다. 에르제가 추구하는 결에 잘 맞는 파이다. 에르제에서 크로와상보다 빨미까레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가성비다. 한 번에 다 먹어야 하는 크로와상과 다르게 빨미까레는 여러 번 나누어서 먹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개로 잘라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도 좋다. 크기도 넉넉해서 선물하기에도 좋다.
크로와상, 크로롤은 혼자 먹는 경우가 많다. 설령 같이 먹더라고 그걸 다 잘라야 한다. 누군가는 크로와상 혹은 크로롤 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실제로 최근 지인의 인스타에서 본 테니의 뉴욕롤른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철저히 가위로 해체되었다. 그렇게 가위로 잘라진 뉴욕롤. 누군가는 크림만 먹었을 테고, 누군가는 빵만 먹었을 거다.
성수동에서 가장 많이 찾는 베이커리는 언제나 에르제다. 에르제에 발걸음이 자주 가는 또 다른 이유는 포장 때문이다. 에르제는 모든 빵을 종이로 싸준다. 포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종이 박스 안에 한 층 한 층 쌓이는 빵들을 보면, 눈가에 미소가 절로 올라온다. 그보다도 에르제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그렇게 포장된 종이박스가 정갈하다.
종이박스에 잉크만 뭍은 에르제 로고. 그 정갈함은 소중한 이를 위해 빵을 전하는 마음을 잘 담은 거 같다. 특히 크고 넓은 빨미까레가 종이에 한 겹 한 겹 포장되는 걸 보는 순간에는, 내 마음도 한 겹 한 겹 따뜻해진다. 포장된 그 포장을 다시 한 겹 한 겹 벗겨낸다. 빨미까레를 한 겹 한 겹 조각내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빵은 혼자 먹는 것보다 서로 뜯으면서 먹을 때 더더욱 맛있다. 기브 앤 테이크 혹은 나눔이 메말라가는 요즘. 빨미까레의 파이결을 보면 뭔가 ’ 나눌 수 있음’에 그 안에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설령 에르제에 가서 빨미까레는 사지 않아도. 에르제 앞을 지나가도 늘 빨미까레를 본다. 에르제 앞을 지나가더라도 빨미까레는 스콘과 함께 창가진열장에 있기 때문이다.
빵이 밥과 다른 점은 ‘결’이다, 밥은 겹겹이 쌓아서 먹는다. 반면에 빵은 찢으면 늘 결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결로 마음을 채우고 있을까? 마음의 결을 보고 싶을 때마다 에르제의 빨미까레를 산다. 그때만큼은 늘 마음이 푸근해진다. 종이로 포장된 빨미까레를 품고 길을 걸어가면, 늘 소중한 누군가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