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팽이인간 Nov 25. 2021

눈이 오면

나는 여전히 눈이 반갑습니다


 한겨울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소복이 쌓이면, 익숙했던 공간이 특별해집니다. 


매일 오가던 길의 새카만 아스팔트 바닥도, 나뭇잎이 떨어져 앙상했던 나뭇가지도, 오가던 이가 앉아 잠시 햇볕을 쬐던 공원 벤치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 본래의 모습을 감춥니다.  



    

새하얗게 변한 공간은 세 가지 마법을 보여줍니다.


먼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상의 색보다 한층 더 밝은 색이 있다는 걸 일깨웁니다. 칙칙하여 어두운 공간도 눈으로 덮이면 밝은 공간으로 바뀝니다. 특히 한밤중에 가로등이 드물게 있어 유독 어두워 무서웠던 길도 용기를 내 걸어갈 수 있습니다. 


눈이 쌓인 공간에 있으면 순간 기온이 따뜻하다고 느껴집니다. 눈이 차가운 공기를 눌러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눈’ 하면 차가운 이미지보다는 따뜻한 이미지가 더 많이 각인되어 있어서일까요. 두툼한 옷과 보드라운 털실로 짠 목도리, 모자, 장갑, 따뜻한 코코아와 크리스마스트리, 훈훈한 온기를 담은 노란 불빛과 손난로 등이 연이어 떠오릅니다. ‘눈’에서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뜻한 것들을 끄집어냅니다.


마지막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으면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것 같습니다. 물속으로 잠수하면 수면 위의 소리가 웅웅대며 잘 들리지 않듯이, 눈이 내릴 때도 눈이 주는 고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쌓인 눈이 거리의 소음을 가둬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눈이 오면 반가운 마음에 사랑하는 이에게 눈 소식을 알립니다. “눈 온다!”

함께 있다면 같이 창가에 매달려 내리는 눈을 감상합니다. 혹시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면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안부 전화를 나눕니다. 요즘은 아이들과 눈을 함께 볼 기회가 많은데, 키가 작은 아이를 위해 두 팔로 안아 올려 눈을 볼 수 있게 해 주느라 어깨와 팔이 아프지만, 마주 안고 있는 동안 ‘콩콩콩’ 아이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합니다. 눈은 서로를 가까워지게 하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내리는 눈을 한참 보고 있자면, 어릴 적 친구들과 속닥이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첫눈을 같이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사춘기 10대 소녀에겐 충분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언제 누구와 첫눈을 맞이할 수 있을까. 첫눈을 함께 맞는다고 사랑이 이루어질 리는 없건만, 눈은 서로를 가까워지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 기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아마도 눈이 오면 마음도 같이 새하얘지는 기분에 들뜨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요즘은 예전만큼 눈이 마냥 좋은 건 아닙니다. 

눈이 오면 “와~ 눈이다!”라며 반기다가도, 곧이어 ‘운전할 때 미끄러울 텐데, 어쩌지. 길 막히겠다.’, ‘집 앞 눈 치우려면 꽤 걸리겠는데.’ 같은 현실적인 걱정이 몰려옵니다. 눈을 보면서 반가움을 밀어내고 걱정거리를 떠올리는 걸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걱정은 잠시뿐, 신나는 아이들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올겨울 눈이 많이 와서 썰매도 타고 눈사람도 만들고 싶다는 아이를 보면서 썰매와 스키 장갑, 부츠를 미리 마련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전히 ‘눈’을 떠올리면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머릿속으로 휙휙 놀거리를 생각하는 걸 보면, 아이들 덕분에 아직 미약하게나마 티끌만 한 동심은 붙잡고 있구나 싶어 기쁩니다.


세월이 흘러도 이 동심을 꼭 붙잡고 있는 유쾌한 할머니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어중간하고 애매한 인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