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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Jun 04. 2022

아빠의 스웨터


“아이고~ 그 옷 좀 버려요. 보풀이 다 일어서, 그게 뭐야.”


오랜만에 친정에 놀러 가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는 중이었다. 엄마의 타박은 아빠를 향해 있었다. 무심한 시선을 들어 아빠를 보니, 그제야 보풀이 잘게 일어난 보랏빛 스웨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는 멋쩍은 듯 보풀이 일어난 소맷자락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와. 집에서 입으모 되지.”라고 했다. 그리곤 이내 “보풀이 마이 생겼네.” 중얼거리다 슬그머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빠는 눈에 익은 스웨터 한 벌을 들고 나와 나와 남편 앞에 펼쳐 보였다. 평소 아빠가 즐겨 입는 옷이었는데, 이걸 왜 가져 나왔나 하는 의문의 눈으로 쳐다보니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이거 야(여기서 ‘야’는 글쓴이 ‘나’를 가리킨다)가 사준 긴데. 오래돼도 보풀 하나 안 난다. 깨끗하재. 진짜 좋은 옷이다. 이거.” 


‘내가 사줬다고? 저걸 내가 사드렸었나? 기억 안 나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하는데, 엄마가 끼어든다. “그게 벌써 언제 적 꺼야. 10년도 넘었겠네.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사서 선물한 거잖아.”


‘아…. 그랬나!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내가 사드리긴 했는데, 아빠의 취향을 몰라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샀던 기억이 났다. 직접 고른 선물이 아니라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걸까. 아빠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물을, 나는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몇 년 전 보았던 안방 한편에 자리한 아빠의 옷장이 떠올랐다. 몇 벌 되지 않는 옷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중요한 날에만 꺼내 입는 20년은 된 듯한 양복 한 벌과 그에 못지않은 세월을 보낸 스웨터와 바지 몇 벌, 그리고 10년 전 20대 사이에서 유행하던 옷들. 몇 년 전 동생이 결혼해 분가할 때 두고 간 옷을 아빠는 좋아한다. 재질이 튼튼하고 색이 마음에 쏙 든다며 말이다. 60대 후반의 할아버지가 입기에 너무 젊은 취향의 옷이 아닌가 싶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


지금도 옷장 문을 열면 몇 년 전과 똑같은 옷들이 걸려있을 것이다. 아빠의 옷장은 시간이 멈췄다. 은퇴하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찾아가면 성격이 둥글둥글하니 유머 코드가 맞는 사위를 붙들고 옛날의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수십 번도 더 들었을 그 이야기들을 남편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흥미롭게 들으며 호응한다. 말수 없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가 오랜만에 딸과 사위를 만나면 최고의 수다쟁이 못지않게 신나서 이야기한다. 그 모습에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걸.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스웨터의 존재만큼 아빠의 은퇴 후 시간도 우리 가족에게 기억되지 못한 채 사그라든 것만 같아 먹먹해졌다.     


“우리 아빠 이런 스웨터 또 하나 사드려야겠네.”라고 중얼거리며, 아빠가 좋아하는 스웨터를 만져보았다. 여전히 부들부들한 촉감에 따뜻함이 손끝에 전해지는 듯했다. 올해는 꼭 직접 고른 스웨터를 선물하겠다 생각하며, 손끝의 온기가 잊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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