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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Jun 19. 2022

닮은꼴 찾기

김종서에서 해그리드를 거쳐 달려라 하니 까지


 길고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냈다. 실연이라든지 심각한 심경의 변화가 있어 자른 것은 아니다. 단지 코로나19를 핑계로 1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미용실에 가지 않았고, 그 덕에 나의 머리카락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버려진 정원의 잡초처럼 제멋대로 자라났을 뿐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허리춤에 닿을락 말락 길어버린 머리카락이 오래 묵혀둔 쓸데없는 짐처럼 느껴졌다. 머리에 곰 한 마리를 이고 다니는 것 같달까. 머리 감기도 버거웠고, 말리기도 귀찮았다.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어 가위를 들고 싹둑 잘라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남편은 긴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정리되지 않은 긴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곱슬에 머리숱이 많은 나의 머리는 항상 붕 떠 있고, 비가 오면 한층 더 산발이 된다.


연애할 때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머리를 유심히 보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 너, 연예인 닮았어.

- 누구?

- 김종서


얼마 전엔 저녁밥을 먹던 남편이 신기한 걸 발견해 놀랍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 너, 영화배우 닮았어.

- 누구?

- 해그리드


해리포터에 나오는 산발 머리의 거인 아저씨를 말하는 거니? 그간 살이 쪘긴 하다 마는... 김종서에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사실 남편이 아무리 김종서니 해그리드니 놀려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비 오는 날 아이의 하교를 위해 집을 나서다 마주친 거울 속에는 정말 해그리드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미용실에 갈 때가 된 것이다.     





단발펌을 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캡처해 동네 미용실로 향했다. 이 얼마 만에 방문하는 미용실인가. 출산 후부터 머리를 하려고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아졌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고 있을 수 있으니까. 


내가 내민 사진을 보고 미용실 사장님은 “살짝 S컬로 만거네~”하며 자신감을 내보이셨고, 나는 기대하며 머리를 맡겼다. 머리를 말며 사장님과 자녀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은 두 아이의 교육방식과 험난한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된 지금도 자식에 대한 고민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설파하시며, 자녀를 키우는 데에는 정답이 없다는 결말로 끝을 맺었다. 그동안 나의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잘 말려가는 듯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돌돌 말린 머리카락을 풀어냈을 때, 거울 속에는 털이 풍성한 푸들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사장님…. 이거 너무 빠글빠글한 거 아니에요…?” 경악한 나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망했다는 생각에 뒤의 ‘아니에요…?’ 부분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순간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고, 당황으로 잘게 떨리는 사장님의 눈동자를 포착할 수 있었다. 


파마하면 머리를 감고 말릴 때 자연건조 하라던 사장님이 드라이기를 들고 둥근 빗으로 머리를 쫙쫙 펴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드라이하면 안 된다고….”

“머리 좀 풀어지라고 펴는 거예요. 모레쯤에 감아봐. 그럼 좀 덜 할 거야.”


수습이 가능할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이틀 후 머리를 감았다. 거울 속에는 거대한 버섯 머리가 탄생해 있었다. 재빨리 미용실에 달려갔다.

“사장님. 저 머리 어떻게 해요.” 

울상으로 묻는 나에게 사장님은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머리를 못 만져서 그래~ 파마는 잘 나왔는데. 이리 와서 앉아봐요.”

싹둑싹둑 머리카락을 좀 더 다듬어 잘라주신다. 쇼트커트에 가까워졌다.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윙윙 울리기 시작했다. 더 만지면 안 돼! 머리는 회복 불가능해 보였다. 1~2주 후에 머리를 다시 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수습을 해보자. 

반 묶음을 해보려 했지만, 기장이 짧아 묶이지 않았다. 머리띠를 해보았다. 촌스러워 보인다. 어쩌지. 


길을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나와의 친밀도에 따라 반응이 각기 달랐다. 보통의 친밀도를 갖은 경우 “머리 잘랐네요. 잘 어울린다~”의 예의상 멘트가 나왔고, 친한 사이의 경우 “머리 왜 잘랐어? 긴데 나은데”, “성숙해 보인다(나이 들어 보인다)”, “괜찮아. 가을쯤 되면 좀 길겠지.”라는 말을 하거나, 얼굴을 보자마자 깔깔깔 웃기도 했다. 나도 같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안구에 습기가 찼다.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 머리 어떠냐고 솔직히 말해보라니, “엄마 머리 할머니랑 똑같아.”라는 말에 한가닥 유지하고 있던 긍정의 기운마저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렇다. 내 머리는 66세의 쇼트커트 파마를 한 우리 엄마와 비슷한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나의 머리를 보더니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입술을 씰룩였다.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남편이 말했다.

- 너, 만화 주인공 닮았다.

- 누구?

- 달려라 하니


해그리드에서 달려라 하니 된 거면 성공한 건가...  

   

수습 불가능할 것 같던 나의 머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익고 적응되어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는 개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얼마 전까지 즐겨 입던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면 그렇게 아줌마스러울 수가 없다. 나 아줌마가 맞긴 한데, 덜 아줌마처럼 보이고 싶은데, 이제는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뒤로 보나 아줌마의 스멜이 모락모락 풍겨 나온다.


아무래도 김종서 때가 나의 리즈 시절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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