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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 Jun 26. 2022

알다가도 모를 나의 어린 스승님

아이의 세계


- 엄마! 엄마! 나 학교 끝났는데~ 슬리퍼 좀 가져 나오면 안 돼?


무전기로 흥분에 뒤섞인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슬리퍼라니. 너 혹시...


- 엄마~ 빨리~! 분수 나오고 있단 말이야~ 


날이 더워지니 며칠 전부터 학교 옆 공원의 분수대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워터파크가 개장된 거다.  



    

분수대는 대리석과 돌로 지어져 있어 물이 묻으면 미끄러울 뿐만 아니라, 구조도 물길이 미로처럼 구불구불하니 깊게 파여 있어 위에서 뛰어놀다가 발을 헛디뎌 아래로 빠지면 크게 다칠게 분명해 보였다. 해서 분수대가 가동되기 전에도 분수대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으면 저지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분수대에는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도 떡하니 붙어 있다. 하지만 물이 높이 솟아오르는 만큼 아이들의 마음도 같이 솟아올라 물에 뛰어드는 거다.  

   

- 분수대 위험해. 들어가지 마. 어제도 들어갔다가 넘어질 뻔했잖아. 신발도 다 젖고.

- 신발 안 신고 들어갈게. 그러니까 얼른 슬리퍼 가져 나와~ 나 지금 분수대 밖에서 보기만 하고 있다고.


아니, 얘야. 내가 지금 신발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는 게 아니잖니.  

   

아이는 무전기로 계속 재촉해댔다.

- 엄마 어디야? 슬리퍼 가져 나오고 있어?

- 가고 있어. 분수대 위험해. 공원 관리하는 아저씨가 보시면 혼난다~

- 위험하게 안 한다니까? 응? 제발~~~~

   



공원에 가니 가관이다.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4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대여섯이 분수대에 들어가 온몸으로 분수를 맞고 있었고, 그 옆에서 몇 명은 분수가 나오는 입구에 차곡차곡 돌멩이를 채워 넣고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옷이 젖는 게 싫어도 물은 좋은지 분수대를 빙 둘러싸고 물이 나오는 걸 구경하고 있었고, 저학년 남자아이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비닐봉지와 페트병에 물을 담아 서로 뿌려대며 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 아이는 바지를 허벅지를 지나 속옷이 있는 라인까지 둘둘 말아 올리고 양말을 벗어 맨발로 분수대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을 발로 차며... 세상에... 그 와중에 한 친구가 어디서 우산을 구했는지, 우산으로 분수와 힘겨루기를 시작했고, 거친 물살은 사방으로 튀었다. 오 마이 갓...


일단 아이에게 다가가 분수대에서 내려오라고 한 뒤, 분수 입구에 돌멩이를 넣는 아이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망가지면 다시는 분수쇼를 볼 수 없을 것이야.    

 






매우 아쉬워하던 아이는 두 명의 남자 친구와 놀이터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햇볕은 쨍쨍 땀방울은 줄줄인데, 너희들은 덥지도 않은 거니. 따라가기도 버겁다. 나는 멀찍이 그늘 밑으로 들어가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신발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아이들은 놀이터의 출렁다리에 나란히 앉았다. 출렁다리 밖으로 다리를 빼내 앉은 아이들은 젖은 옷을 햇빛에 말렸다. 그중 오른쪽에 있던 아이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더니 친구들에게 나누어 줬다. 발에 묻은 흙과 이물질을 닦아내라는 듯했다. 발을 닦은 아이들은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앉은 우리 아이는 핸드폰이 없어 아이들이 하는 게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후 왼쪽에 앉은 아이가 출렁다리에서 빠져나와 신발을 찾아 신고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친구들의 신발을 모아 가지런히 발아래 놓아주었다. 세상에... 저게 9살 아이가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쏘 스위트 한 행동을 보며, 우리 아이가 나중에 저렇게 자상한 남자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라는 주책맞은 생각을 했다. 

한 친구가 일어나자 나머지 아이들도 일어나 신발을 신고는 사용한 물티슈를 정리했다. 우리 아이는 친구가 흘린 물건을 챙겨 가방에 넣어 주었다.

 

서로 챙기는 모습에 방금 전 분수대에서 개구지게 놀던 아이들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는데, 서로를 배려하는 행동을 보니 잠시간에 훌쩍 자란 느낌이다.


항상 그랬다.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 깊이 생각을 할 줄 알았고, 배려하는 행동을 할 줄 알았다. 그랬음에도 나는 매번 그 사실을 잊었다. 어린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실들을 간과했던 게 아닐까.







아이들의 행동이 오늘의 나보다 더 성숙하다고 느끼며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저쪽에서 한 무리의 여자 친구들이 몰려왔다. 그중 한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다가와 같이 얼음땡 놀이를 하자고 했다. 아이는 남자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눈치였지만,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았다.


신발 정리 친구에게 물었다.

- OO아, 왜 친구들이랑 얼음땡 안 해?

- 여자 애들이랑은 안 놀아요. 시끄러워요.


읭? 그럼 방금 전까지 같이 논 우리 아이는 여자가 아닌 거니.


- OO이도 여자인데...

- 아, 그건 달라요.


뭐가 다르다는 거니. 


공대 시절, 과의 동기들이 군대 가기 무섭다며 나에게 동반 입대하자고 졸라대던 기억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래.. 그런 거였니...




한없이 철없는 어린아이 같아 웃음과 함께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다가도, 배려가 담긴 순간적인 행동에 감탄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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