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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 Jun 30. 2022

비에 젖어 쪼그라드는 건 기껏해야 발 뿐이다

한 발만 앞으로 내디디면 될 뿐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온다. 우산을 써도 신발 안으로 물이 스며들고, 옷이 젖어 찝찝할 게 분명하다. 등교하려는 아이에게 어차피 젖을 거 양말 신지 말고 구멍이 뻥뻥 뚫린 크록스를 신고 가라고 했다. 물웅덩이만 보면 장난치고 싶어 쓸데없이 높은 점프력으로 발휘하는 아이이기에.

 

베란다에 서서 아이의 우산이 흥겹게 들썩이는 걸 지켜보았다. 우산을 어떻게 드는 것인지 등 뒤로 맨 가방은 우산의 보호를 받지 못해 이미 흠뻑 젖었다. 청범 청범! 평소보다 더 힘찬 발걸음은 물이 튀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때 무전기로 한껏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 옷 다 젖었어!” 그리고 연이어 말한다. “슬리퍼 신으니까 엄청 신난다!” 

    

학교를 가려면 학교 옆에 자리한 공원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비가 많이 내려 스무 개 정도 되는 계단은 이미 물 폭탄을 맞아 폭포가 되어 있었다. 콸콸콸 넘쳐흐르는 빗물 앞에서 노랗고 파란 알록달록 우산들이 옹기종기 몰려 있었다. 아이들은 30초 정도, 폭포 계단을 뚫고 올라가야 할지 먼 길을 빙 둘러 가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동안 우산은 더 많이 모여들었고, 그중 몇몇 아이들은 멀어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때, 머뭇거리던 우산 속에서 한 아이가 계단을 힘차게 오르게 시작했다. 철벅철벅! 그 아이가 계단을 중간쯤 오르자, 나머지 아이들도 하나둘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계단 앞에 도착한 우리 아이는, 앞의 아이들처럼 고민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첨벙첨벙 씩씩하게 계단을 올랐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내 발이 흥건히 젖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지는 발바닥이 느껴졌다.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비에 젖은 발을 신나게 놀려 영화관으로 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젖은 발을 말리며 영화 보는 것이 좋았다. 부슬비가 오는 날 대공원에 가 동물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비가 오면 동물들은 서로 대화를 하는 것만 같다). 지붕에, 창문에,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혀 나는 다양한 리듬의 비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비가 온다고 해서 하지 못할 일은 없었고, 가지 못하는 곳도 없었다. 비 좀 맞으면 어때. 털어내고 씻으면 그만인걸.


언제부턴가 비 오는 건 여전히 좋지만, 비에 젖는 건 싫어졌다. 신발이 젖는 것도, 아무리 조심해도 빗길을 걸으면 튀는 흙탕물이나 달라붙는 이물질도. 나에게 묻는 것이 싫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침범하는 게 싫은 것일까. 반복되는 일상에 이벤트가 생기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일까. 변화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닐까. 나의 용기는 모두 어리로 간 것일까. 같은 비를 맞으며 생각과 행동이 다른 나와 아이를 보니 고개가 갸웃해졌다.  

   

어른이 되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줄 알았다.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것이었고, 아이든 어른이든 스스로 선택과 이행을 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보물섬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육체는 세월을 입고, 도전의식은 쇠퇴해 간다. 발이 물에 흠뻑 젖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진대, 나는 어째서인지 앞으로 나아가길 머뭇거리며 점점 빛을 잃어 간다. 후회하는지도 모르고 후회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발이 쪼글쪼글해진다고, 내 마음도 쪼그라드는 건 아닌데 쪼그라들었나 보다.


     





 하굣길, 여전히 비가 내린다. 부슬비 따위는 맞아도 상관없는지 계단을 내려오며 구부러진 우산 손잡이를 난간에 걸쳐 밑으로 미끄러트리고 자신도 난간을 신나게 쓸고 내려오는 아이를 보며, 저렇게 즐겁다면 나도 이제 빗속을 편안히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한 발만 내디디면 되는데, 어차피 젖을 거 조금 더 젖는다고 문제 될 건 없는데. 즐거울 수 있다면 우산이 없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빗속을 뛰며 춤을 출 수도 있겠지.


왠지 오랫동안 용기 내지 못해 시작하지 않던 일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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