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팽이인간 Nov 12. 2021

할아버지 이발사

알프레도와 토토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길


  “으아아아앙~~~!!!!”

미용실이 떠나가라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 본다. 평소에 좋아하던 젤리도 주고, 뽀로로도 보여줬지만 소용이 없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깎으려는 미용실을 탈출하려는 듯 온몸으로 저항을 한다. 발버둥 치는 아이를 더는 안고 있기 힘들어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안돼. 안돼. 머리카락 반뿐이 못 깎았단 말이야. 한 번만 자르면 돼~ 다 했어.”

나의 목소리는 아이가 악쓰는 소리에 묻혀버린다. 오른쪽은 짧게 깎고, 왼쪽은 아직 깎지 못해 장발인 채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 울어댄다. 우느라 벌린 입안으로 깎아진 짧은 머리카락들이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섞인 침이 흐른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마주 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꽉 끌어안은 상태에서 겨우 나머지 반을 깎아내고는 급하게 미용실을 나온다.

“사장님, 힘들게 해 드려 죄송해요. 이런 아이들은 돈을 적게 받으실 게 아니라 두 배는 받으셔야 할 텐데.”

“아이고~ 어쩌나. 아직 마무리 덜 됐는데.”


아이의 머리는 군데군데 덜 깎인 곳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괜찮아요. 집에 가서 잘 때 제가 가위로 자를게요. 수고하세요~”     




이발기 소리는 물론, 이발하기 전 목에 두르는 천조차 거부하는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발기를 구매했다. 낯가림이 있는 아이라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이 머리를 깎으니 거부 반응이 심한 건가 싶어 집에서 깎아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집도 미용실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

좋아하는 뽀로로를 틀어 놓고 입안에 젤리를 하나 물려준 다음, 내가 품 안에 꼭 안고 있으면 남편이 이발기를 든다. 윙~ 이발기 전원을 켜자마자 아이가 발작하듯 울기 시작한다. 나와 아이의 몸에 깎인 머리카락들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눈에 코에 입에 귀에 점차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쌓이기 시작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아이의 옆머리는 쥐가 파먹은 듯이 깎여 버렸다.


아이의 머리를 본 친정 아빠가 아이에게 묻는다.

“하늘이. 머리 누가 깎았노.”

“아빠.”


이번엔 나와 남편을 바라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씀하신다.

“아 머리를 우에 이래 깎았노.”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엄청 난리 쳐.”

“화장실에 앉차가 쓱 깎으면 될낀데. 담엔 내가 깎아 보께!”


자신감 넘치는 한 마디에 순간 아빠가 군대에서 이발병을 했었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이발기는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분이다.




시간이 흘러 쥐 파먹은 아이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이발이 필요한 시점이 왔을 때. 아빠는 이발기를 갖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불신의 마음으로 인해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볼일이 있어 잠시 아이를 친정 부모님께 맡긴 사이 외출해 있는 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 내용은 사진 하나가 전부였는데, 사진 속에 동자승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아이가 젤리를 손에 들고 웃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내가 물었다.

“안 울었어요?”

“울긴 와 울어? 젤리 하나 주니 가만히 있드만.”


말도 안 돼. 놀라우면서도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온몸에 머리카락 묻혀가며 진땀을 빼도 안됐는데. 이럴 수가.   



  

아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4살인 지금까지도 엄마와 아빠를 제외하고 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한다. 할아버지가 아이의 수준에 맞춰 몸으로 같이 노는 걸 잘해주시기 때문에, 할아버지 옆에만 있으면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젖힌다. 너무 웃어 기침을 콜록콜록할 때도 있을 정도다.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자전거를 함께 타고 달리는 알프레도와 토토가 떠오른다. 서로 친구가 되고, 스승이 되고, 조언자가 되는 애정이 밑바탕이 된 특별한 관계.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닌, 운명처럼 이어지는 그런 사이 말이다.

둘만의 특별한 유대관계가 있으니 예민한 아이가 머리카락을 믿고 맡겼나 싶기도 하다.

     



사실 첫 번째는 우연히 울지 않은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할아버지가 이발을 해줄 때 지켜보니 놀랍게도 전혀 울지 않고, 할아버지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굳은살이 배긴 투박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잡고 조심스레 깎는 모습을 보니 손끝에서 사랑이 넘실넘실 흘러나오는 듯했다.

아마 아이는 머리 깎이기에 급급한 엄마 아빠의 조급한 손끝보다는,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사랑이 담긴 할아버지의 손끝의 차이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아 기를 때는 이쁜지 몰랐는데, 야들(손주)은 와이리 이쁜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동생이 어릴 때는 빈손으로 시작한 가정을 일구어나가야 하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양가 할아버지는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할아버지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가끔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정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에 반해 우리 아이들은 양가 할아버지들이 건강히 계시니 부러울 따름이다.


살면서 부모님을 제외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적다. 그런 사랑을 가장 먼저 쉽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이지 않을까 싶다.

나도 30년 뒤에 알프레도 같은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알프레도와 토토처럼 둘의 우정이 긴 시간을 함께 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단짝 없는 게 엄마 탓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