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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Aug 06. 2024

비가 오니 런던이 맞네요.

관광지 도장깨기를 시작합니다.

아침 8시. 런던 도착. 비가 오는 걸 보니 런던이 맞는가 보다. 6시간의 공항 노숙으로 초췌해진 우리는 모든 긍정의 힘을 끌어모아 아침을 먹고 첫 번째 관광지로 걷기 시작했다. 첫인상을 말하자면.. 내 상상 속 런던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우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현대적인 건물과 거리가 많았다. 자칫 정신줄을 놓으면 우린 습관대로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정처 없이 걸을 것임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한다. 자, 이제 시작이야. 숙련된 패키지 여행객처럼 일사불란하게 딱딱딱! 할 수 있지?


첫 번째 미션: 버킹엄 궁전으로 가시오.

런던에 처음 왔으니 대장부터 만나러 가야겠다. 역시 주변을 조용하게 만드는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있다. 대부분 궁전이라 함은 몇 세기 전에 사용했다고 하는데 여기는 지금도 왕이 살고 있으니 느낌이 달랐다. 여왕님이 계셨을 때 왔으면 의미부여를 더 했으려나.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자꾸 내 시선을 빼앗아 간 건 따로 있었다. "와, 여기가 버킹엄 궁전이구나!"하면서 실제로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는 건 바로 궁전 옆에 붙어 있는 공원이었다. 내가 이렇다. 난 공원을 정말 좋아한다. 그걸 아는 K가 공원을 가로질러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 잔뜩 찌푸린 하늘이었지만 초록초록한 공원은 아름다웠다. 청설모, 오리, 이름 모를 다양한 새들까지 동물농장이 따로 없고, 예쁜 꽃들이 지천에 널렸다. 이거야, 이거. 이거지! 사람도 많지 않아서 누군가의 비밀정원에 몰래 들어온 기분이었다. 비 온 직후라 의자에 앉기 어렵고, 하늘도 잿빛이었지만 눈과 마음이 충분히 즐거웠던 산책이었다. 이제 다음 미션지로 이동할 차례다.


두 번째 미션: 런던 3대 명소를 정복하라.

빅벤으로 갈수록 많아지는 빨간 공중전화박스 중에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는 곳도 있었다. 아마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것이겠지? 빨간 2층 버스, 빨간 공중전화박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미디어로만 런던을 접한 우리에게 '런던스러움'을 가져다주는 건 다름 아닌 이런 디테일이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택시다. 너무 귀엽잖아.. 런던에서 제일 귀여운 건, 택시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걷다 보니 빅벤과 웨스트민스터궁이 등장했다. 오오오오. 생각보다 훨씬 웅장하네! 바로 근처 다리에 서니 유명한 런던아이도 보인다. 요리조리 사진을 찍어보는데.. 이상하게 하늘을 뚫을 만큼 흥이 올라오지 않는다. 왜일까.


세 번째 미션: 스타벅스를 찾아라.

런던까지 가서 뭔 스타벅스냐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카페라떼를 정말 좋아하는 우리는 두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라떼를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방콕에서는 숙소 주변에 카페가 없었고, 이스탄불에서는 라떼가 밍밍했다. 동네 카페든, 스타벅스든, 국내 프랜차이즈든, 평점을 보고 간 카페든, 무려 카페거리에 있는 카페든 모두 라떼가 맛있지 않았다. 매번 실망만 하던 우리는 배신감에 어떠한 커피도 믿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런던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발.. 원래 스타벅스 그 맛이기만 해 줘, 제발.


지도를 보니 다리 맞은편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런던아이를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고 설레는 마음으로 스벅을 갔지만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조금 더 걸으면 스벅 또 있어, 가보자. 워털루역 근방까지 왔으나 지도에 영업 중이라고 표시된 스벅은 그 자리에 없었다. 폐업한 흔적이 있는 듯하다. 허무함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뭔가 이상하다. 깨진 유리병이 널브러져 있고 찌든 냄새가 나는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마저 별로 없었다. 슬금슬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2시간 반째 계속 걷는데 결국 커피는 한 입도 마시지 못했다. 갑자기 밤샘 비행부터 쌓여온 피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이 동네에서 벗어나 활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소호로 갔다.


쪼르륵 서 있는 빨간 공중전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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