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쉼이 있는 삶_무림고수 K
2월 바람도 차가운 어느 날 저녁 인천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 차안에서 바라본 검은 산과 산, 그 위에 파스텔 톤으로 발갛게 번진 노을은 일상에 지친 마음을 가만히 다독여 주는 듯 했다. 한참을 감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산과 노을이라면 내 주위에 붙박이 그림처럼 항상 걸려있었을 텐데 왜 나는 그것을 몇 년 간 단 한 번도 못 본 것 마냥 낯설게 느낀 걸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차에는 선물을 잔뜩 사 담아오라고 J가 내어 준 어마어마하게 큰 여행가방과 캐디백, 보스톤백이 실려 있다. 그렇다. 정말 오랜만에 지인들과 해외 골프 투어에 나선 참이다. 화타 문석 선생의 어깨운동 금지령을 막 자체 봉인해제하고 가는 여행이어서 그 만큼 더 달뜨고 기대 만땅 심산이 됐다. 대한민국 주말골퍼들이 겨울 한파를 피해 가는 골프투어는 동남아행인 경우가 많다. 이번 투어 행선지 역시 필리핀. 내 경험 상 해외여행과 골프투어는 시너지가 대단하다. 공항으로 달려가는 차안에 실린 여행가방과 캐디백은 나에게 무늬가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기쁨이 두 배가 된다.
전날 밤, 여행 전 치르는 예의 그 의식으로 집 거실 책장에서 책을 골라 내기 시작했다. “장자나 가져가서 볼까……” J가 타박하고 나섰다. “그 두꺼운 책을 언제 보겠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요량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펼쳐서 보면 그만인데. 장자를 다시 책장에 조용히 꽂고 골라낸 책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호흡과 리듬은 다르지만 모두 남녀의 진한 사랑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상실의 시대는 대학 시절에 읽었고 ‘노르웨이의 숲’ 제목 버전으로도 읽었는데 내용이 가물가물 기억이 안 났다. 폭풍의 언덕은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아직 못 본 책이다.
항공기 좌석에 앉아서 책 세 권을 나란히 꺼내 놓았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껭끼 데스까~”대사로 유명한 일본 영화 ‘러브레터’는 나에게 ‘설국’을 연상시킨다.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얼마 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귀천(歸天)한 잔상 때문인지 설국을 펼쳤다. 책 머리 빈 페이지에 ‘2014년 12월, 어마무시하게 재미 있을 거 같은 소설. 도입부부터 참 좋다’는 내 기대감이 적혀 있다. 맞는다. 누가 뭐래도 이 소설의 백미는 도입부다. 시적 표현과 운율이 단연 압권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나는 반대로 눈 기운과 차가운 바람을 뒤로하고 열국으로의 2박3일 골프 여행에 나섰다. 국경을넘어 한 시간 쯤이나 날았을까. 식사 시간이 되자 불이 켜지고 기내 테블릿PC 방송이 골프 콘텐츠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식사와 함께 저마다 와인, 맥주, 콜라를 받아 든 승객들이 태블리PC에 시선을 고정하고 동반자들과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시작했다. “스코티 세플러는 폼도 희안한데 정말 잘 친단 말이야.” “오 굿 샷! 스윙 끝장이다. 나는 왜 저게 안되지?” “넌 요즘 핸디 몇 개니, 난 80대로 들어 왔거든” “드로우 샷은 말이야, 이렇게……” 식의 이야기들이 앞뒤로 들려왔다. 그래서 주위를 돌아보니 왜 아니겠는가. 대다수가 나와 같은 중년 주말골퍼들로 보였다. 항공기가 마치 겨울 동절기를 피해 열국으로 골퍼들을 실어 나르는 전용기처럼 느껴졌다. ‘아, 우리 대한민국 골퍼들처럼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없을 것’이란 평소 생각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3일을 체류하면서 3라운드를 돌았다. 첫날은 그 이국적 골프장 풍광에 마음이 홀렸다. 초록초록하는 양잔디 평지 코스. 아열대의 자연을 고스란히 품은 골프장. 샷은 처음 산탄이 났다. 오랜만의 라운드라 티잉 그라운드에서 얼라인먼트가 잘못된 듯 싶었다. 라운드 중반 이후부터 샷감이 살아날 기미를 보였다. 첫날 라운드에서 마음에 드는 샷은 2개 정도 뿐이었다. 캐디들이 파를 ‘파르르르~’라고 장난스럽게 발음하며 깔깔 웃는 천진함에 동반자들 모두가 따라 웃고 말았다. 라운드가 끝나고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꼬마 아이들은 너나없이 미소 짓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밝았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부턴가 저런 웃음을 잃어버린 것 아니었나 싶었다.
이튿날 2라운드는 시합 모드로 치러졌다. 우승자를 뽑는 것이다. 1라운드 성적으로 팀을 배정했는데 나는 1조였다. 시합인 만큼 전략적으로 공을 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긴 파5홀이 아니면 2, 3번 아이언, 홀에 따라서는 5, 6번 아이언 티샷을 했다. 샷감이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드라이버를 잡으면 좁은 홀에서는 OB가 나거나 해저드에 빠질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파4 마지막 홀. 워터 해저드를 건너가야 하는, 오른쪽으로 크게 꺾인 이른바 도그렉 홀. 5번 아이언 티샷이 왼쪽으로 많이 당겨졌다. 세컨드 샷 지점에서 거리를 재 보았더니 205미터가 찍혔다. 오르막 홀인데다 약간의 맞바람 상황. 4번 아이언 뽑아 들었다. 찰진 샷감이 좋았다. 빨래줄 같이 날아간 볼은 홀 2미터 안쪽에 붙었다. 동반자들이 “굿샷”을 외쳤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 그날 동반자들이 서로서로 굿샷을 외친 덕분에 나는 싱글 스코어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승했다.
다음날 마지막 라운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골프장이라고 했다. 주말골퍼 용어로 조선잔디 구장이었다. 관리는 최상이었다. 그런데 페어웨이에 빼곡한 잔디를 너무 길다 싶을 정도로 잘라 놓아서 나는 곤혹스러웠다. 다운 블로우로 디봇을 시원하게 내고 아이언 클럽이 깨끗하게 빠져 나가야 하는데 헤드가 잔디에 잡혀 자꾸 왼쪽으로 감기는 샷이 연달아 나왔다. 벤 호건은 훅샷으로 고생을 하다가 그립과 스윙을 교정해 페이드 샷을 치면서 불세출의 골프 영웅이 됐다. 나도 차라리 샷이 오른쪽으로 밀리면 그날 라운드는 해 볼만 한데, 왼쪽으로 감기는 샷이 나오는 날은 정말 노답이 되는 것이다. 이날 나는 백돌이처럼 플레이했다. 아아, 골프는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또 재미있다. 나를 끊임없이 실험에 들게 하는 골프여, 내가 끝내 너를 정복하고 말리라! 하는 것 그 자체가 재미다.
알랭드 보통은 책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했다. 여행의 참맛은 사유에 있다. 바쁜 일상에서의 탈출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그런 돌아봄과 삶의 쉼표는 일과 열정이 있어서 가능하다. 일상으로의 복귀는 나에게 활력을 가져다 준다. 주말골퍼들의 천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는 항공편에서 어느새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의 계획들이 머릿속에 빼곡히 떠오르는 것이다. 굿바이, 골프 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