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골프보다 그늘집 막걸리가 좋을 때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_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골프에도 분명히 궁합 같은 게 있다. 골프를 오래한 주말골퍼라면 아마도 나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거 같다. 골프 라운드를 나가면 동반자들에 따라 공이 잘 맞기도, 덜 맞기도 하며 아주 참혹할 만큼 안 맞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와 라운드를 하느냐에 따라 골프가 180도 달라지는 일이 적잖이 벌어진다.


내가 가장 가슴 설레는 골프는 고수들과의 라운드다. 요즘도 고수들과 라운드가 잡히면 몇 주 전부터 주말이면 연습장을 찾아가 샷을 가다듬고는 한다. 예를 들어 전장이 짧은 골프장이 잡혔다면 우드와 2, 3번 아이언 티샷 연습에 몰두하는 식으로 그날 라운드에 대비한 나만의 특별 연습을 하는 것이다. 라운드 전날에는 가슴이 뛰어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 고수들은 흔히 말하듯 골프에 진심인 선수들이다. 모두가 저마다 인고의 시간을 거쳤을 터이다. 그래서 각기 강점을 갖고 있다. 대포알 같은 드라이브 샷을 날리거나, 송곳 같은 아이언 샷을 자랑하고, 귀신 같은 어프로치를 무기로 장착한 사람들 말이다. 주말골퍼 이전에, 학창시절부터 스포츠맨으로 통했던 나는 운동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빠져든다. 본디 초록은 동색인 까닭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골프를 사랑해서 골프 고수가 된 사람들과 일파만파니 멀리건이니 하는 에누리 없이 PGA 룰로 겨루는 진검승부가 진정 내 심장을 뛰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에 잠자고 있던 스포츠 DNA가 여지없이 깨어나 미친 듯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잊고 지낸 승부욕 같은 것이 끓어 오르기도 한다. 질 수 없다는. 이게 바로 스포츠 전반에 통용되는 재미 요소다.


고수들과의 라운드는 즐거움 외에 얻는 것도 많아 좋다. 서로서로 배우는 윈윈의 라운드가 전개되는 것이다. 바둑 속설에 ‘9급 아홉 명이 모인다고 해서 1급이 되지는 못한다’고 했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고수의 눈이 더 정확하다. 그립부터 얼라인먼트, 다운스윙 리듬과 템포 등 미묘하게 변화한 동반자의 실수를 캐치해 알려준다. 그러한 조언 하나로 틀어졌던 골프 스윙이 다시 본모습을 찾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고수는 고수들과 라운드를 더욱 더 하고 싶어 지는 것이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같이 발전한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즐거움을 더하는 골프 라운드도 있다. 나한테는 십 년 넘게 골프 라운드를 같이해온 형님들이 있다. 처음에는 비즈니스 골프로 시작했는데 서로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면서 나중에는 골프가 사적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친한 형님들인데 라운드를 같이 나가면 이상하게 공이 안 맞는다. “다른 골프 라운드에서는 싱글을 친다면서 우리한테는 왜 안 보여주냐”고 빙글빙글 웃는 형님들.



한 번은 “오늘은 기필코 싱글을 해 보일테다” 마음을 단단히 잡고 나가서 전반 9홀에 4개의 버디를 잡은 일이 있는데, 그늘집 막걸리 타임 이후로 보여 주리라 갈고 나간 마음의 칼이 다시 무뎌지면서 결국 라운드를 80대 중반 스코어로 마친 일도 있다. ‘이번엔 무언가 꼭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과 반대로 ‘골프 그 자체보다 그늘집 막걸리가 더 좋은 모임’이라는 자기위안이 상호작용하면서 낮은 타수를 기록하는 걸 방해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과 더불어 공 치고 술 마시고 웃고 이야기를 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에게 또다른 골프 동반자가 생겼다. J가 몇 달 전 골프를 시작한 것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라운드를 같이할 동반자가 될 듯싶다. 아마도 내가 J를 골프의 세계로 끌어 들이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골프를 안 했을 수도 있겠다. 뜯어보면 나와 J는 책 읽기를 즐기는 공통점 외에는 취미에 있어 기호가 조금 다르다. 학창시절 이후 운동을 안 한 기간이 없을 만큼 스포츠광인 나는 과격한 ‘운동파’에 가깝고, J는 엄격한 ‘예술파’라고 나는 분류한다. 주말, 여가 시간이 난다면 나는 미친듯이 운동하는 게 무엇보다 즐겁다. J는 으레 미술관이나 음악 공연장으로 나설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고흐나 바흐를 보고 듣기 좋아하는 것은 같지만, 주말이면 뻥 뚫려본 적 없는 서울시내 교통과 주차 대란에 골머리를 끙끙 앓느니 그냥 동네 골프연습장에나 후다다닥 다녀온 다음에 보고 싶은 책을 읽는다면, 이 얼마나 경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여가생활인가 생각할 따름이다.



이제 주말이면 가끔 J와 골프연습장에 같이 가곤 한다. 결혼 생활 내내 어떤 운동도 같이 해본 일이 없어서인지 신기한 기분도 든다. J는 이른바 똑딱이를 거쳐서 7번 아이언을 배우더니 이제는 제법 드라이버 풀스윙까지 연습하고 있다. 얼마전 실내 골프연습장 앞 타석에서 J가 스크린 기록으로 처음으로 드라이브 샷을 100미터 넘겨 치는 장면을 목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기에 J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J는 어떤 날은 공이 잘 맞았다느니 흥에 겹고, 어떤 날은 비거리가 줄었다느니 축 처지기도 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제대로 골프에 발을 담갔군’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든다. 흥과 처짐, 희열과 고통의 그 끊임없는 굴레에 일단 들어서기만 하면 발을 빼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을 나는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J는 첫 라운드를 나갈 생각에 들떠 있는 듯하다. 벌써 필드에 같이 나갈 동반자를 물색하는 낌새다. 더불어 부쩍 질문도 늘었다. 그늘집은 왜 그늘집이고 거기서는 막걸리만 파는 것이냐 같은 걸 나에게 묻는다. 궁금할 수도 있겠다. 나도 궁금하다. 필드에 나가면 J가 과연 어떤 플레이를 하게 될 것인가. 처음 몇 년간은 뒤땅과 토핑, 그린에서 홀을 지나쳐 반대로 왔다갔다하는 오락가락 퍼트를 하는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런 뒤에는? J도 깨백을 하고 보기플레이어가 되거나 혹시 80대 타수의 고수로 거듭 날수도 있을까. 그렇게 J는 나만큼이나 녹색 잔디와 그 위로 부는 청량한 바람과 파란 하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J가 첫 라운드를 나간다니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는 집 거실 책장에 웨지 한 자루를 꺼내 기대놓고 심심하면 붕붕 빈스윙을 해댄다. 주말골퍼가 평일에 연습장을 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J는 지금 골프의 세계로 들어왔다지만 그것까지 용인하지는 않는다. 아, J가 거실에서 골프클럽을 휘두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이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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