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의 '정의론' 제대로 이해하기
고스톱에서 통용되는 말이 있다. 첫끝발이 개끝발이라고. 고스톱에서만 그럴까. 대부분 초보자들은 처음 입문할 때 생전 처음 해보는 것임에도 꽤 좋은 결과를 얻어 스스로도 놀라는 경험을 자주 한다. 스포츠든 악기 연주든 게임이든. 주식도 비슷한데, 그런 현상을 비기너즈 럭(=초심자의 행운)이라 부른다. 불행히도 나 또한 그랬다. 첫 서너 달은 매수하는 종목마다 빨간불이었다.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 첫 손맛이 나를 늪으로 빠져들게 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지금도 늪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기너즈 럭은 일반적으로 심리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처음이라 기대치가 없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우연히 얻기 마련인 승리에 도취된다거나, 실패한 기억보다 승리한 기억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석한다. 이는 우리가 점성술이나 사주 등의 미신적 요소를 믿는 심리 작용과 거의 흡사하다. 심리 테스트 결과 분석도 비슷한 이치다. 이를 '바넘 효과'라 칭한다.
나의 비기너즈 럭은 심리적인 요인보다는 실질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이 더 컸다. 정말 정말 불행하게도 내가 본격적으로 주식에 뛰어든 시점은 2021년 2월이었다. 5~6월까지는 짜릿한 수익을 맛봤다. 매달 10~20% 정도 수익률을 올렸다. 초짜임에도 지나치게 큰 수익률이었다. 그때는 분산 투자가 필수라는 조언을 어디서 주워 듣고는 한 번에 10개 이상의 종목을 매수하던 때였다. 웃긴 건, 10개를 샀는데 10개 다 오르는 날마저 제법 많았다는 것이다. 운이 나빠도 7~8개는 올랐다. 오르면 팔고 다른 걸 사고 오르면 팔고 다른 걸 사기를 반복했다.
내 계좌에 파란 물감은 없었다. 그럴수록 환상에 절어갔다. 겨우 이만큼 공부하고도 수익을 볼 수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의 공부조차 안 해서 손실을 본다는 건가. 그런 오만과 편견이 뇌와 손을 지배했다. 이대로 가다간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스노우볼 이론. 최소 월 10% 수익을 낸다 예상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1년 반이면 충분한 시드를 마련하고도 아파트 대출을 완전히 다 청산할 수 있었다. 그 후 2년이면 서울에 아파트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알겠지만 2020년 4월부터 2021년 여름까지는 유래없는 한국증시의 미친 호황기였다. 그냥 아무거나 사도 오르는 시절이었다. 나는 당연히 몰랐다. 지수라는 개념도 몰랐고, 주식시장의 주기라는 것도, 시장의 영향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보였다. 다 내 실력인 줄 알았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실력이 아니라 호시절 덕이었다는 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월별 수익률을 체크해 보면 지수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임을 확인하고 새삼 놀란다. 코스피/코스닥 지수가 조금이라도 상승세일 때는 수익률이 만족스럽지만, 하락세일 때는 수익률이 처참하다. 여진히 의문이 든다. 어디까지가 내 실력이고 어디부터가 환경적인 요인일까.
한때 한국과 미국에서는 '능력주의' 논쟁이 잠깐 유행했다. 능력주의란, 능력에 따라 사회적인 대우를 받도록 하자는 주의를 말한다. 능력주의 논쟁이란 그러한 세계관에 대한 찬반 의견의 장을 일컫는다. 이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오래, 깊이 이어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 논쟁에 제대로 참가하려면 반드시 존 롤스의 '정의론'을 정면돌파해야 한다. 저기서 그 유명한 '무지의 장막'과 '원초적 자아' 개념이 나온다. 롤스는 현실에서의 합의와 계약은 불완전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각 개인에게 그만의 고유한 역사와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속한 요인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나는 남자이거나 여자이고, 특정 국가의 국민이며, 어느 집 자식으로 태어나 어느 지역에 살고 있다. 당연히 그 기반 위에서 나는 판단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맺어지고 체결된 합의와 계약은 공정할 수 없다.
합의와 계약이란 게 뭐냐고 묻는다면, 사회와 연관된 모든 산물을 일컫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구체적으로는 의회에서 새로 법을 만들거나 기존법을 개정하는 사례를 떠올려도 된다. 이때 우리는 내가 어느 지역에 살고 있으니까, 내가 남자니까, 내가 40대니까, 내가 소득이 어느 정도니까 등등의 요소를 따지고 고려해서 법안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마련이다. 그런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각자 이기심의 총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롤스는 합의하기 전에 '무지의 장막'을 씌우자고 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실적인 변수와 역사를 지우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 '졸라맨'이 되라는 뜻이다. 그 졸라맨이 바로 '원초적 자아'이다.
이때 로버트 노직과 마이클 샌델은 그런 자아를 상정하는 논의는 허무한 이상론일 뿐이라 반박한다. 우리가 각자 '개인'일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졸라맨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역사 덕분이라며 말이다. 내가 특정인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모든 인격을 거세한 졸라맨으로서 사랑과 존경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의 개성과 현실적인 변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지의 장막을 덮어 원초적 자아가 된 상태에서 맺은 합의와 계약이야말로 무효라고 그들은 선고한다.
그런데 위의 반박은, 노직과 샌델이 롤스의 견해를 오독하고 오해한 결과이다. 롤스도 개인이 개인일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지닌 모든 특성과 지난 역사성 덕분임을 인정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롤스는 무지의 장막을 개인에게 덮어씌우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롤스는 무지의 장막으로 개인을 가리라는 게 아니라 현재 사회를 가리라고 말한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마이클 조던은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20세기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위대한 농구 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만약 18세기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태어났다면 일 잘하는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내 능력이 100인데 내가 태어난 사회의 능력치 범위가 10~100이라면 나는 상류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100인 능력으로 100~1000의 능력치 범위를 가진 사회에 태어났다면 나는 최하위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남자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자인 채로 남성 중심 사회에 태어나는 게 중요하다. 남자로 태어난다 해도 여성 중심 사회에 태어난다면 오히려 나의 성性은 패널티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성애자로 태어난다거나 백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그 자체로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건물주로 태어난다 해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건물주로 태어났는데, 건물주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현재와 정반대라면 오히려 불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롤스는, 개인이 가진 변수와 특성 그 자체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라 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따라오는 사회적 대우는 온전히 개인의 소유라 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무지의 장막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씌운다. 이때 원초적 자아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회에 태어날지를 모르는 상태를 뜻한다.
애초에 나의 능력이 온전히 내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나의 유전자는, 내가 살아온 환경은, 내가 노력해서 만든 게 아니다. 우연히 나를 찾아온 것들이다. 그것들이 내게 준 나의 성향이나 능력치를 온전히 내 것이라고 주장해도 괜찮을까. 과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내 뜻대로 정한 요소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백 번 양보해서 롤스와 노직, 샌델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듯 우연히 주어진 내 능력이 모두 내 것이라 치더라도, 그 능력으로 인해 내가 '특정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 대우는 나의 몫이라 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모두 '예스'라고 답하기는 민망해진다. 지금 나의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마침 이러한 사회에 태어났기에 내가 인정받는 거라면? 그래서 내가 부와 명예를 누리는 거라면?
주식 투자야말로 그러한 겸손함을 저절로 깨닫게 되는 장이 아닐까 싶다. 시장을 거스르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시장에 올라타서 이익을 얻는다. 세력조차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명분 없이 무조건 가격을 후려쳐 올리는 경우는 없다. 현재 상당수의 투자자들이 한국증시를 떠나 미국증시로 간 것도 결국은 시장에 올라타기 위함이다. 테마주를 매매하는 것도 국소적으로 좋은 시장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철새와 같은 행태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지금이 좋은 시장인지 나쁜 시장인지 파악하는 눈과, 좋은 시장을 찾아내는 안목, 나쁜 시장에서는 몸을 사리는 방어력, 좋은 시장을 찾았다면 과감히 그 쪽으로 떠날 수 있는 행동력일 것이다.
Q. 지금 수익을 낼 수 있는 건 내 능력 덕분이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앞으로도 꾸준히 주식 공부에 매진하고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vs 아니다. 내가 수익을 낼 수 있었던 건 시장의 호황과 좋은 이슈, 기업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들의 노력 위에 올라탄 것뿐이다. 그러니 항상 겸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