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렬히, 무수히 무엇이든 사랑해야지.
심시선 가계도를 펼쳐보며 읽어나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모든 인물에게서 ‘심시선’의 흔적을 찾아 나가려 애썼다. “‘심시선’은 가족들에게 어떤 존재였나. ‘심시선’의 자손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심시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나. 다른 성격들의 심시선 자손들은 어떻게 어우러진 가족이 되나.” 하지만 그다지 쓸모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게도, 엄마와 할머니를 닮는 나의 모습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각자가 다른 듯하지만 어찌 되었든 엄마이자 할머니인 ‘심시선’의 모습을 닮았고, 그 부분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었다, 같은 계보 안에서 나타나는 특질 같은 것이었다.
시선의 가족은 하와이에서 시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여행하게 된다. 그들이 하와이에서 만나 제사를 지내고, 그 과정에서 하와이를 여행하며 자기만의 방식들로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제사를 위해 가져오는 보통의 제사가 아닌 제사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선물해 주었다. 제사를 이뤄낸 과정이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p334)’이기에 그랬던 것 같다. ‘심시선’은 혹독한 20세기를 살아가면서 그녀만의 싸움(p182)을 했고, 만약 21세기에 그녀가 살아갔다면 그때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그 시대에도 나름대로 행복을 찾으려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끝까지 잃지 않았으나 지금이었다면 덜 혹독했을 테니. 그런 그녀에게, 그녀를 위한 제사는 21세를 살아가는 자손들의 위로이자 사랑이 될 것이다.
그녀의 자손들이 바치는 제사를 위해 하와이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심시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고, ‘심시선’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였다. 형식적 틀에 박힌 제사가 아니라 ‘심시선’도 그 제사에 동의하고, 그 모습들을 보며 기뻐했을 것 같다.
- 사랑. 우리는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마다 사랑의 방식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아직 겪지 못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랑도 있고, 매일 넘치게 겪어 주체하지 못하고 버려버리는 사랑도 있고, 넘치는 것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랑도 있고, 매일 주어도 부족하다 느끼는 사랑도 있고, 알맞은 크기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도 있다. 그 사랑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고, 사랑의 방식 또한 무궁무진하다. ‘심시선’의 자손들이 그녀를 위해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여행하며 보여준 이야기도 역시 사랑이다. 시선의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내뿜고 있었다. 그 사랑은 역시 시선이 나누어준 조각(p13)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안다.
‘심시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우윤’이었고, ‘심시선’이 나누어진 조각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조각은 ‘우윤’이 가진 것이었다. 자기가 가진 한계를 알고서 극복하기 위해 무수히 노력하고 이뤄내고 마는 모습에서 ‘시선’의 느낌을 가장 많이 받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머물렀던 시점도 우윤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우윤은 어렸을 적 아팠고, 건강을 되찾고 나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같은 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p95). 그래서 더욱 서핑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물론 배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사촌 동생인 규림보다 뒤떨어지고, 바닷속에서 수없이 넘어진다. “원래 모든 운동은 계단식으로 느는 거야.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포기하면 안 돼.”라는 선생님(앤디)의 말에 왜 자신의 계단만 유난히 폭이 넓고 험난한 형태인지 투덜거리기도 한다.(p153) 왜 자신의 계단만 유난히 폭이 넓고 험난한 형태인지 투덜거리는 우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예전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나만 힘들고 좌절하게 되는지, 스스로 우울함에 빠뜨리며 나아가지 못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데 왜 나만 제자리인지 좌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누구에게나 계단은 있고, 계단은 험난하며, 오르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타고난 체력 같은 것이 다를 수는 있어도 오르지 못하는 계단은 없듯이 누구나 그 과정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갈 힘을 많이 얻는다.
그리고 역시나 우윤도 마침내 파도를 타는 것을 성공해서 파도의 거품을 시선의 제사에 가져가기로 한다. 파도의 거품을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속으로 박수를 쳤다.결국 해내고 마는 모습에서 용기와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사랑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자신을 스스로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사랑. 다른 것보다 우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은 것은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다음 눈에 들어온 조각은 지수가 가진 조각이었다. 지수는 자유로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수는 규림의 다이빙강사인 체이스를 만나게 된다. 그 둘이 친해지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울리며 나누는 사랑을 보았다.
꾸준한 데가 없어서 여러 직업을 스쳐 지나갔다고 말하는 지수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열려 있는 사람이라 변화에도 적극적인 것(p204)이라고 말하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체이스의 시선 또한 타인을 사랑에 기초하여 바라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트랜지션을 준비한다는 체이스(p208)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바라본 지수 역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존중하는 사랑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한다.
둘은 마지막까지 자유롭다. 기름유출사고로 인해 피해를 당한 야생동물을 구조하는 작업을 하는 일을 같이 하러 가자고 체이스가 제안하고 지수는 곧바로 받아들인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지만 가족들은 딱히 상헌을 제외하고는 말리지 않는다. 자유로운 지수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겠지. 어쩌면 가족들은 지수의 그 모습에서 시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봤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곳을 이동하며 지낸 시선이지만 어디서든 그녀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조각을 지수가 간직하고 있는 것일지라고.
- “안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p64)라는 우윤의 물음에서 이 소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우윤의 물음에 시선은 마티아스 마우어, 요제프리, 홍낙환씨 셋을 통째로 떠올렸다.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면 셋 다 동시에 만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시선의 답은 그녀의 삶에서 그 누구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다. 시선을 절망 속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그녀의 일부였기에. 그리고 시선은 그 절망을 그녀만의 사랑으로 이겨냈고, 버텨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루어진 조각들은 조각조각 가족들에게 나누어 또다시 다른 사랑으로 이어졌다.
다른 가족들에게도 각자의 조각들이 분명히 있었다. 명혜, 명은, 명준, 경아, 화수, 지수, 우윤, 규림, 해림, 태호, 보근까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며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유를 가지고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묻어두기도 하며 살아간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p334)이라는 정세랑 작가의 말뜻이 무슨 의미를 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가지고 나누고 있는 조각들을 모아 먼저 세기를 살아낸 시선에게 바치는 여행을 통해서 또 다른 시각으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랑과 조각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작은 조각을 큰 조각으로 만들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랑은 이렇게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나 보다. 열렬히, 무수히 무엇이든 사랑해야지. 사랑은 조각조각이 되어 또 다른 사랑이 될 테니, 시선의 가족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