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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에서 느낀 고향의 맛

수련회 아니고, 대만 여행 맞습니다.

by 새내기권선생

여행하는 동안에는 어디로 흐르던 즐거우면 그만이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대만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생각했다. 건기에 희박한 확률로 오는 비는 낭만을 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날씨는 불규칙한 리듬을 보였지만 여행에 그다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똑같이 비는 내렸지만 이런 낭만을 느껴보지 못했다. 연회색 하늘 사이를 가르고 떨어지는 빗방울. 신선한 흙내음. 이곳에서의 비는 특별했다. ‘홍마오청(紅毛城)’, ‘진리대학교(真理大學交)’를 방문하는 일정에도 무리가 없었다. 청량하고 선명한 풍경을 볼 수 없었으나 모든 것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다음 여행지로 ‘바리(八里)’를 찾았다. 그곳에서 ‘바리 라오제(八里老街)’와 같은 전통 거리를 걸으며 본격적인 여행의 느낌을 맞이하고 싶었다. 마침내 바리로 향하는 선착장에 왔다. 운치 있는 안개 사이로 바다의 지평선이 보였다. 바다의 짜디짠 향기와 철썩대는 파도 소리 속에 기대감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20분. 그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표정은 점차 굳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변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휴항일이 아닐까. 배를 기다리는 건 우리 둘 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기서부터 다가오는 모습에도 우리는 벌써부터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전에 블로그에서 봤던 대로 교통카드인 ‘Easy Card(이지카드)’를 뒷주머니에서 꺼내었다. 뱃값을 치르고도 남을 금액이 충전되어 있었다. 카드를 태그 하려고 하니 직원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No Easy Card?”

“No.”

블로그에서는 분명히 이지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만 믿고 배표를 아예 구매하지 않았기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 길로 매표소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다행히도 표를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것을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탑승한 배 안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했다. 배는 커서 족히 30명은 탈 수 있을 듯했으나, 승객이라곤 우리를 포함해 8명도 채 되지 않았다. 비가 온 탓이려나.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려 했으나 좌석을 보노라니 기가 막힌 걸 감출 길이 없었다. 좌석들은 비를 맞은 듯 물기가 아주 흥건해서 전혀 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창문도 없었다. 다만 바다 밖으로 벽이 뻥 뚫려있을 뿐이었다.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도 별수 없으니 자리에 앉았다.

출발하자마자 빗물과 함께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우리는 가방 속에 넣어둔 작은 3단 우산을 꺼내 바다를 향해 펼쳤다. 그 자그마한 우산 속에서 함께 몸을 기대며 요리조리 물길을 피했다. 긴장감 넘치는 방어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갑자기 매서운 비가 쏟아졌다. 물이 쉴 새 없이 흘러 들어와 안 그래도 축축한 온몸을 흠뻑 적셨다. 나는 얼른 바리에 도착해 이 고통이 끝나기를 바랐다. 애꿎은 시간만 자꾸 체크했다. 그러다 눈길이 자연스럽게 구명환과 구명조끼 방향으로 향했다. 하나, 둘, 셋……. 얼추 스무 개의 구명 용품이 있었다. 순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면서 긴장감이 덜어졌다. 저걸 사용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세요. 나는 작은 우산 속에서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저 멀리서 작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Bali.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배를 타기 전만 해도 바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려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지금은 자전거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얼른 쉬고 싶을 뿐이었다. 우리는 곧 생각이 통했는지 즉시 구글을 켰다.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로 몸과 마음을 녹이면 고된 이 과정도 곧 추억으로 남으리라. 배가 육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정박을 준비 중이었다. 불현듯 바리 땅이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가게들의 조명도 모두 꺼져 있었다. 꼭 죽은 자의 땅으로 온 것만 같았다. 뜻 모를 불안감이 치솟았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로 바리를 검색해 대기 시작했다.

휴무일. 아, 가슴에 서늘함이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희망을 건져내기 위해 다른 카페와 가게를 검색했다. 제발, 목소리가 나를 휘감고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대왕오징어’조차도 휴무일이라는 낯익고도 무심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우리가 시간, 분 단위로 촘촘하게 완벽한 계획을 짜왔다고 하지만, 제아무리 잘 짜인 계획이라 하더라도 휴무일이라는 벽 앞에서는 몽땅 쓰이지 못할 아이디어일 뿐이었다. 그때 한 블로그에 쓰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대만의 전통 시장이나 관광 명소, 특히 ‘바리 라오제’와 같은 장소들은 주말에 가장 활발히 운영됩니다. 대체로 월요일은 휴무일로, 주말 동안 소진된 재료를 보충하거나 상점 정리, 청소 등을 위해 시간을 보냅니다.”

왜 이제야 이걸 본 걸까. 아침만 해도 바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북적이는 인파를 구경할 줄로만 알았던 내 마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곧장 그 배를 타고 또다시 공포의 항해를 했다. 출발한 지 몇 십 분이나 되었다고, 바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우리의 처지가 참 서글펐다.

결국 출발지로 돌아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터벅터벅 걸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나무 패널에 원형의 로고, 초록색 타원. 그것은 바로 ‘스타벅스’였다. 대만까지 와서 굳이 스타벅스를 가야 하나? 잠깐 동안 그런 생각을 했지만, 우리는 이미 스타벅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순전히 본능이었다. 우리는 본능에 복종하면서도 뒤늦게 떠오른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익숙한 맛, 익숙한 공간, 무엇보다도 휴무일 따위가 없는 카페. 바로 이거다!

국산 브랜드가 아닌, 미국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한국인에게 향수를 심어준다는 게 제법 우습기도 했다. 우리는 항상 국산이 우리에게나 우리 사회에게 더 이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국산과 외국산은 뒤섞여있기에, 실용적이고 유익이 된다면 굳이 원산지를 따지지 않고 유익함을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다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렇더라도 개인의 취향이라는 건 이국의 경계를 넘어 존재했다. 대만이라는 타국의 스타벅스에 와도, 내 취향에는 균일함이 존재했다. 한국과 똑같은 선택을 하며 비로소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제일 좋아한다. 누군가의 손을 타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지만, 아메리카노 원두의 쓰면서도 살짝 새콤한 그 맛을 먹었을 때 안정감을 되찾는다. 대만에서도 나의 취향은 동일했다. 아메리카노에는 실패가 없었다. 잇따른 디저트의 한 입. 익숙하고도 달콤한 그 맛은 항해를 통해 잔뜩 긴장된 근육을 흐물흐물 녹여 주었다.

아무래도 우리 반 학생들에게 세계화의 장점에 대해 확실히 알려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스타벅스는 만국인력의 법칙이 있다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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