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왠지 아는 척해야 할 거 같아서

I와 F 감성 가득한 나의 대만 이야기

by 새내기권선생

우리는 ‘융캉 공원(永康公園)’을 산책하면서 느린 여행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공원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비쳤다. 많은 사람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낮에 이렇게 긴 줄이라니, 나는 맨 앞 줄의 상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한 남성이 사람들과 셀카를 찍고 있었다. 낯이 익은 것 같은데…. 그렇지만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인지, 대만 사람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흡사 유튜버나 연예인쯤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저 누구인지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될 것을, 괜스레 쑥스러운 마음에 맨 뒷줄로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친구가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

“Who is he?”

무어라 말하는 대답에, 친구는 놀라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선호민!”

이 많은 사람을 줄 세운 사람의 정체는 바로, <환승연애 1>의 주인공인 ‘선호민’ 씨였다. 나도 <환승연애>를 다 봤던 팬이었는데, 왜 못 알아봤을까. 나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도, 연예인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설렘이 점점 커졌다. 앞사람의 줄이 줄어들고 있었다. 선호민과 가까워지면서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팬심이 마음을 간질였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한 손으로 셀카를 찍으면서 동시에 물었다.

“촬영 때문에 오셨어요?”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뇨. 정카트 하러 왔어요.”

“정카트요?”

“네, 정카트요.”

“…….”

짧고도 긴 정적이 이어졌다.

“아, 네! 감사합니다.”

공원을 빠져나오며 친구가 물었다. 정카트가 뭔지 아냐고.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당장 휴대전화를 켜서 선호민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들어갔다. 게시물을 몇 개를 넘기니, 그는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다음 게시물에서는 그런 쓰레기들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모습이 있었다. 아, 그제야 정카트의 정체가 머릿속에서 반짝 빛났다. 정크아트. 임용 시험을 준비할 때만 해도 미술 과목에 나왔던 개념이었는데, 왜 그걸 깨우치지 못했을까. 우리는 정크아트의 정체에 허무하게 웃고 말았다.

해가 기울어지며 저녁이 다가왔다. 하루의 마감을 아쉬워하며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가게에 앉아 주문을 하려 하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쳤다. 옆자리 손님이었다. 그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Xie xie.(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안…넝하쎄요”, “깜싸합니따” 그들은 우리에게 대만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칵테일을 사주었다. 우리는 친절과 환영에 감사의 축배를 들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른 사람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Show map!”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한참을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니까 그가 다시 한번 “Show map”이라고 외쳤다. 나는 그게 맵, 그러니까 지도를 보여달라는 소리인지 아니면 길을 막고 있어서 비켜달라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Duibuqi.(미안합니다)”라고 답하면서 미적지근한 미소와 함께 길을 터주었다. 그는 연거푸 ‘Show map’을 말했다. 이윽고 그는 우리의 손목을 잡아 이끌더니 자신의 테이블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척 당황했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무슨 일이라도 벌이겠나 싶어서 순순히 따라갔다. 그는 테이블에서 한국의 소주와 맥주를 꺼내 보였다. 우리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시 외쳤다.

“Show map!”

아, 소맥! 우리는 그가 말하려던 정확한 뜻을 이해하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오늘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리면서 혼자 배시시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운이 깊은 에피소드였다. 선호민의 정크아트와 소맥, 이라니. 예상치도 못한 여행의 사건들에 나는 유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나는 왜,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유독 질문을 잘하지 않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유명한 사람이 눈앞에 있거나 낯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할 때를 비롯한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질문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허공을 보고 있노라니 불쑥 어렸을 적의 내가 떠올랐다. 전형적인 소심한 중학생. 특히 선생님의 질문에도 어물쩍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물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내가 ‘내향인’이라는 걸 알고, 오늘과 같은 비슷한 상황에서는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스스로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기에 나를 다독이지 못한 순간이 허다했다. 당시 내향적인, 이라는 말보다 소심하다, 는 말이 혼란스러움을 주곤 했는데 그게 그때의 나를 조그마한 유리벽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한 반에 있더라도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은 다른 법이다. 나의 과거를 떠올릴 만큼이나 부끄러움을 잘 느끼는 아이도 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자꾸만 외향적이고, 활달하며, 사교성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만 한다. 마치 그게 이상적인 사람인 것처럼. 사람의 천성이란 각기 다른 법인데,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을 한 가지로만 맞춰서 바꿀 수 있을까. 키의 작고 큼과 같이, 성격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동시에 그게 다른 부분에서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소심함 덕분에 질문을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그 쑥스러움을 감추고자 공부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올까 봐 두려운 마음에 악착같이 공부했다. 지금이야 Chat GPT라는 도구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인터넷 포털에 일일이 질문을 올려야 답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나는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질문을 올리면서 문제를 풀어갔다. 물론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렇게 혼자 문자를 해결했다.

어렸을 때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행할 때만이라도, 질문을 해보자’ 낯선 이 곳에서만큼이라도 이 소심함을 내려놓아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행에서의 이 소중한 순간을 되돌아봤을 때 후회로 가득하다면 매우 아쉬울 게 분명했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선호민에게, 그리고 옆 테이블의 대만인에게 자신 있게 질문을 던지는 나를 떠올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