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친절의 얄팍함

# 나나 잘하세요..

by 별솜별

한때 메일 주소를 kind__@ 아무개로 생성할 만큼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컸다. 일본어학을 전공한 영향도 없지 않았는데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혼네 또 타테마에(ほんねと建前)’*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면서도 겉모습과 속마음이 분리된 행동을 프로페셔널하게 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알게 모르게 동경하곤 했다. 다혈질에 작은 일에도 흥분을 잘하고 후회하는 편이라 다소 감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을 보면 무한히 경외하며 언젠가는 닮기를 소망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성격이란 게 쉽게 바뀌지 않았고 나는 친절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날카로움, 쌀쌀맞음, 괴팍함에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라는 소리도 참 많이 들었는데 외모는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굉장히 솔직하고 할 말은 다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나를 비꼬는 사람들이 던진 질령나는 외모 평가의 한마디였고 일정 부분은 인정한다. 크고 (나름) 맑은 눈을 가졌지만 나를 화나게 하는 대상에겐 더없이 차갑게 흘겨보았고 나긋나긋 단정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분노를 참지 못하면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하는 등 예상외로 반전이 있는 사람이라 놀랐다는 소리도 꽤 들었다. 뭐 어찌 됐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만 남고 말겠지 여기며 긴 시간 포기하고 살았다.


이런 내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그리고 갑과 을이 명확히 존재하는 ‘에이전시’에서 첫 직장을 시작하고 주욱 비슷한 업계에서 여태껏 일을 하다 보니 얼핏 친절함이라는 회로를 갖게 된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AI처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년생 시절의 대부분은 거의 처참했다. 평소 성격대로 참지 못하고 저질러 버리는 경우가 많아 인사평가는 엉망으로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회생활에 정말 맞지 않는 나라는 작자는 되지도 않는 친절함을 몸에 익히기까지 고되고 고된 과정과 지난한 시간을 감수해야 했다. 수없이 많은 실수와 질타를 받고 난 후에야 그럭저럭 예전보다는 내 몸에 친절함이라는 무게가 적어도 몇 그램 정도는 탑재되었다.


늘 친절에 대해 동경했지만 내게 쌓인 친절함은 얄팍함 그 자체였다.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 아닌 억지 친절의 가면은 주고받는 사람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도구 같았다. 오로지 일로 인해 타의적으로 지녀야만 하는 하나의 덕목 같은 재질의 친절함. 친절에 눈코입이 있다면 입만 웃는 모양을 가진 친절함이랄까. 가끔은 감정을 싹 빼고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서비스직의 성향도 상당 부분 차지하는 에이전시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클라이언트를 관리하고 비위를 맞추며 다음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수주하고 그렇게 예산을 받아 수수료를 떼어먹으며 우리의 월급을 만들어가야 하는 시스템. 이 일을 하면서 친절함은 굉장히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중 하나였다. 업무적인 스킬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정말 중요한 이 능력이 떨어지면 결국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업계에서 오래가진 못할 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몇몇 선배들의 수순을 보면 어깨너머로만 살펴도 쉽게 그려지는 미래였다.


적어도 이 일을 하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혹은 에이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더라도 어느 정도 필수적인 기본 덕목인 것은 맞다. 다만 앞으로 내가 바라는 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힘겨운 가식적인 친절함이 아닌 함께 일하는 파트너라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중과 배려 차원에서 나눌 수 있는 그런 친절함이다. 100%까지 진심이 담기진 않아도 좋지만 일을 하며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진심 어린 응원과 격려의 마음으로 보답하는 그런 친절함이 깃들길 소망해본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는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지만 나는 나라는 작자에게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신 똑디 차리고 나나 잘하세요! 나부터 그런 친절을 먼저 베풉시다’ 그렇게.




*혼네 또 타테마에: 혼네 = 속마음, 타테마에 = 명분(겉으로 내세우는 말)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의미. 겉으로는 웃거나 사과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일 수 있다는 일본인들의 태도를 표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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