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겨)우울

# 가을을 찾아 헤매는 나라는 겨울 성애자

by 별솜별

올가을 첫 한파 특보,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10월의 어느 가을 하늘에 찾아온 날벼락같은 소리. 반팔 차림이 엊그젠데 카디건을 걸칠 새도 없이 패딩을 입고 있다니. 우리의 가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이 시국, 봄에 태어난 코로나 베이비(코로나19 시대에 태어난 아기라 칭해본다)와 함께한 육아는 독박 육아의 희망이자 숨통인 콧바람 쐐기조차 쉽지 않아 한동안 그 흔한 산책 한번 나가는 일에도 벌벌 떠는 겁쟁이로 지냈다.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꽃피는 봄날에도 우리에게 ‘외출’이란 단어는 엄두도 못 낼 두려움으로 다가와 벚꽃잎 한 장 맞아본 기억이 없던 올봄은 내게 색깔로 치면 잿빛 같았던 나날. 처음 경험한 육아 전쟁과 호르몬의 노예였던 시절이라 더 회색빛으로 기억되었는지도 모른다.


아기와의 외출은 여전히 서툴지만 그래도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 오후에는 종종 만만의 준비(아직 마스크가 낯선 아기를 위한 비말 차단 모자와 유모차 방풍커버 등으로 온갖 무장)를 하고 아파트 단지길 그늘에서 단 몇 분만이라도 바람을 쐐는 일이 소소한 행복이었다. 당연히 긴장의 끈은 놓을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 기침이나 재채기만 해도 먼발치에서 일단정지하고 상황을 살피는 순발력 넘치는 부모가 되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나 날렵한 사람이었나를 새삼 실감하며.


특히나 열 많은 아기와의 일상으로 4월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었던 유독 뜨거웠던 여름. 아파트 탑층인 우리 집은 언제나 가장 먼저 더워지고 가장 먼저 추워졌다. 그래서 항상 계절의 변화를 빠르게 느끼곤 했는데 이번엔 그럴 틈도 없이 별안간 가을이 증발해버렸다. (일상이 호들갑인 나라는 작자는 일시적인 한파 특보에도 이렇게나 생난리를 치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니 다소 오버스럽더라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정말 하루 차이로 온습도계가 고장 난 줄 알 정도로 기이한 체감이었다. 그제만 해도 70%를 육박하는 습도 때문에 방바닥이 끈적끈적할 정도였는데 어제 하루 종일 우리 집 습도는 30% 전후를 왔다 갔다 하며 때 이른 건조함을 선사했고 덕분에 태열에 민감한 우리 아기 피부에는 사라진 가을 대신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이렇게 찰나의 가을을 느끼려던 찰나, 한파 주의보 소식에 단단히 채비를 해 한밤의 겨우울로 성큼 마중을 다녀왔다. 털 후드에 기모 바지, 도톰하고 긴 양말까지 꼼꼼히 챙겨 밤 산책을 나갔다가 허벅지가 얼얼하고 귀가 빨개질 정도의 겨울 냄새를 온몸에 묻히고 돌아온 지금. 문득 잃어버린 가을을 찾아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지나 따뜻한 불빛에 이끌려 들어간 오두막의 맘씨 고운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스튜를 끓여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내 생일도 아니고 엄청난 크리스천도 아니지만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나는 겨울 성애자이다. 코끝에 느껴지는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을, 다른 계절에는 느낄 수 없는 포근함이라는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늦가을과 겨울의 분위기를 너무도 아끼므로 평생 이런 날씨만 있는 나라에서 살라고 해도 당장 ‘예스’를 외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 때문인데 사계절 중 어느 것 하나가 스치듯 사라지며 찾아온 겨울을 마주하기엔 마음이 허하다 못해 헛헛하다. 그렇게 사랑하는 겨울 분위기에 설렜던 것도 잠시, 한낮의 우울처럼 한밤의 겨울에 정말로 우울함이 찾아온 것이다.


사실 산책을 즐기기엔 정말이지 가을만 한 계절이 없다. 볕이 따사롭다고는 하지만 봄의 그것과는 달리 짙은 갈색의 따뜻한 코코아처럼 달콤하고도 씁쓸한 맛을 동시에 품고 있는 모양이 마음을 잡아 끈다. 여름과 겨울이라는 단어에 산책이라는 단어를 함께 두면 어딘지 모르게 너무도 열심인 느낌이 들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 적이 있다. 산책이라는 단어에 담긴 부드러움이 봄이나 가을처럼 힘을 뺀 무채색의 감수성에 더 들어맞는 것 같은 마음에서였다. 산책에 대한 마음이 이토록 귀하고 간절했던 시기를 폭풍처럼 지나왔음에 어서 빨리 단정하게 똑 떨어진 면 셔츠를 한 장 가벼이 걸치고 가을바람을 느낄 수 있는 날씨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한낮 겨울의 그림자로 남아버린 가을의 꽁무니를 겨우 밟으며 슬퍼하는 작자의 차가운 밤이 오늘따라 더 깊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