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쪽이든 내겐 너무 버거운 일
좋은 선배이면서 동시에 좋은 후배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서로 상대적인 의미의 개념이라 대상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둘도 없는 아끼는 후배이면서 누군가에게는 싹수없는 후배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존경의 대명사인 선배이면서 누군가에겐 그저 엮이기 싫은 꼰대 선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수의 사람들이 동경하는 좋은 선배와 후배의 모습은 어렴풋이 그려진다. 물론 나라는 작자는 양쪽 다 한참 전에 말아먹었으며 다음 생에서나 노려볼 만한 꿈같은 소망일 뿐이다. 나름의 노력에도 내겐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앞으로 새로 만나게 될 미래의 선배와 후배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적어도 이 글을 통해 깊이 고민해본다. 이루고 말고의 가능성은 배제하고 그저 이상적인 모습일지라도, 현실을 돌아보고 마음을 비우며 새롭게 채울 날들을 상상해 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차츰 그 모습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내겐 좋은 선배가 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지금은 교류하지 않지만 한때 좋은 선배의 기억으로 남은 몇몇 사람들의 모습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런 선배처럼 커리어를 쌓고 싶고 후배들에게 대하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모든 모습들도 닮고 싶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받은 조언조차 주옥같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서 내겐 더 완벽한 충고가 되기도 했다. 모두가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선배들. 내가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느낀 대략의 모습은 이러하다.
우선 첫인상부터 무작정 좋다고 느끼진 못했다는 것. 시작은 다소 어딘가 소통하기 꺼려지고 냉철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가까이 지낼 수 없을 것처럼 느꼈다. 분명히 철두철미하게 본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 뿐 이리라. 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 고민이나 속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고는 깊이 있고 오랜 관계로 발전하긴 어렵다고 믿는 주의라 벽이 느껴지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짧았고 그로 인해 쭉 이어가는 관계이길 포기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사회생활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한 커플 가식의 껍질을 벗겨내고 술 한잔 기울이며 속 얘기도 (어렵사리) 꺼내고 고민도 터놓고 숨기고픈 마음을 보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 아니겠는가. 내겐 너무 좋은 선배들은 하나같이 두 얼굴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할 때만큼은 정확하고 냉정한 모습을 잃지 않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늘 긴장하며 일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 그로 인해 일의 효율과 능률을 최고치로 쌓아주고 나의 발전을 도모해주는 선배. 하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주저 않고 조언을 구할 수 있고 가끔은 어리광과 투정을 부리는 일도 (어느 선까진) 가능한 사이. 그렇다고 서로를 쉽게 여기는 건 절대 아니고. 함께 일할 땐 또다시 반대편의 얼굴을 가진 이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든든하게 의지하며 일할 수 있는 사이. 너무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한 이 선배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선배였을 때의 모습은 너무 처참하기만 한데, 솔직히 읊어보자면 고약한 성질머리의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쿨병 말기 젊꼰이라 요약할 수 있다. 호락호락한 모습으로 보이기 싫어 내비쳤던 강한 모습은 그저 겉으로만 센척하면서 책임감은 그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으로 얼버무리는 꼴이었다. 그리고 솔직함을 무기로 해서는 안될 공격적 비판(이라고 쓰고 비난이라 읽는)도 서슴지 않았다. 아마 아직도 나의 말에 상처를 안고 사는 이가 있을 것이리라. 힘들 때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긴커녕 일을 하며 겪는 큰 압박감과 중압감에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떠안아 버린 나머지 무책임하게 발 빼고 되려 기대려 하는 모습에 믿음을 잃은 적도 있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한다고 큰소리치지만 내가 허용하는 범위 밖이라면 용납하지 못하여 아닌 척 무시하고 밟아버린 적도 여러 번인 나라는 작자를 아마 말뿐인 꼰대라고 치부한 사람도 많을 터. 이밖에도 수없이 처참했던 선배로서의 모습을 애써 떠올리고 직시하는 이 시간이 몹시 괴로울 뿐이다. 정말이지 이번 생에서 좋은 선배는 말아먹었지 싶다. 자신을 깨닫고 아는 것만으로 개선과 발전의 계기가 충분하다는 섣부른 위로는 말아주시길. 들추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고 인정하는 일은 이토록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한다. 추후 마음이 덧나지 않도록 소독하는 빨간약의 치료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터. 고통은 감내해야 함을 안다.
이번엔 내가 생각하는 좋은 후배의 모습들에 관한 이야기다. 운이 좋게도 나는 굉장히 좋은 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이건 자부할 수 있다. 어쩌면 좋은 선배도 많았지만 내가 놓쳤는지도, 혹은 나 같은 못난 후배를 받아들여주는 착한 선배를 찾는 것은 과한 욕심이며 손에 꼽는 선배라도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게 마땅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 주변 좋은 후배들의 모습은 대략 이렇다. 시키지 않아도 척척 자기 일을 꼼꼼히 하는 것은 물론 나의 작은 의견이나 제안에도 경청하(는 척일 수도 있지만 일단하)는 모습을 잃지 않으며 함께 일할 때 오히려 선배인 내가 든든할 정도로 책임감 있는 모습을 가졌다. 자기 관리나 발전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업무에 대한 적당한 욕심도 있어서 허투루 대충 일하는 경향이 없고 때론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섬세하게 업무의 디테일을 챙기는가 하면 특유의 자신감도 충만하여 센스 있는 결과물을 내는 과정이 대체적으로 스피디하고 순탄하다. 선배로서 늘 긴장하게 만들고 더 나를 발전시켜야 함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자극하는 배울 점이 많은 후배들의 모습은 함께 일하는 동안 덩달아 나를 성장시켰다. 그들과 한 팀으로 일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고맙고 행복했다.
이런 내가 누군가의 후배였을 때의 모습을 명확히 직시하기 위해 또다시 고통스럽게 키보드를 내리친다.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 보이지 않게 노력한 선배의 공을 당연시하거나 쉬운 일로 깔보았다. 결코 순순하지 않고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인 못난 후배인 나라는 작자를 위해 뒤에서 나를 케어하고 실수를 티 없이 커버했을 선배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기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선을 긋는 경계심과 불신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다. 의심이 많은 성격을 숨기지 않고 솔직함이라는 무례한 가면을 쓰고 언짢음을 토로하는 데 겁이 없었고 소위 말해 ‘할 말은 한다’는 웰메이드 이미지 뒤로 숨어 태연한 척 날카로운 비수를 꽂기도 했다. 때로는 켜켜이 쌓인 죄책감을 씻어내려 착한 후배 콤플렉스에라도 빠진 양 힘든 일은 내가 다 견딘다는 미생 코스프레의 명연기도 펼쳤으며 마무리는 무한 생색으로 무대의 막을 내렸다. 이건 뭐 거의 지킬 앤 하이드급 수준의 두 얼굴로 살아온 셈이다. 그럼에도 사회생활을 하며 아직 회사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밥벌이를 할 수 있음에 새삼 의아하고 다행인 마음이다.
나라는 작자는 정말로 사회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성향이라는 것에 지극히 동의하고 또 동의하는 바이며 의심할 여지도 없다. 성향이라는 말이 어쩌면 핑계처럼 들릴 수 있어서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태어날 때부터 사회생활에 딱 맞는 사람은 드물며 그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지 않는 옷과 가면을 쓰고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도 나름의 노력을 해봤음에도 고쳐지지 않았던 결정적 치부들을 적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기 고백과 반성의 글을 쓰는 나라는 작자의 미래(아주 먼 미래라도 괜찮으니)에도 언젠가 꽃피는 봄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나에게 좋은 선배 좋은 후배로 남아준 은인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버텨 일을 하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선배와 후배에 대해, 그리고 반대급부의 나락으로 떨어진 너덜너덜한 내 모습 속 선배와 후배로서의 역할을 돌아보며 여전히 아직도 부대끼며 일하고 살아가는 나라는 회사원에게 마지막 경고의 의미로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