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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연중15주일

로이킴의 <북두칠성>이라는 노래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다  
왠지 나만 이런 것 같아 더 슬퍼오면
주변에 심어진 수많은 나무들을 바라봐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우뚝 서 있잖아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불평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나무,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나무를 좋아하는 저는 어떤 나무를 닮고 싶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늦게 티가 난다고 이름지어진 느티나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참조-내 마음에 느티나무)




샌프란치스코 뮤어 우즈 국립공원에 가면 레드우드(삼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생물인 레드우드는 100미터 넘게 자라고 2천년 넘게 살아있습니다. 그렇게 큰 나무가 물을 어떻게 끌어올리는가 하면 캘리포니아 해안가 짙은 안개에서 물기를 흡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레드우드 역시 해바라기 씨앗보다 작은 씨앗에서 자라납니다. 놀라운 것은 더 많은 수의 레드우드가 자라는 방법은 이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레드우드 나무 한그루가 자라다가 화재나 병충해 등으로 죽습니다. 그러면 그 죽은 나무의 뿌리에서 자식들이 자라납니다. 이렇게 자라나는 나무는 어미 나무에게서 영양분을 받기에 살아날 확률이 더 높습니다. 나중에 어미 나무가 완전히 썩어 없어지면 그 나무 주위로 원형을 이룬 레드우드 군락만 남게 되는데 이것을 Family Circle 이라고 합니다.


가족 원형(Family Circle)을 이룬 레드우드 군락은 태풍이나 바람으로부터 서로에게 의지하며 뿌리는 연결되어 있어 필요한 영양분을 나누며 자라납니다. 가운데 그루터기로 남은 어미 나무를 둘러싸고 말이죠.


우리 삶도 이와같지 않나요? 우리 각자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씨앗으로 혹은 뿌리로부터 우리는 생명을 빚지고 살아갑니다.


때론 어쩔 수 없이 늘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가족같은 존재가 어려운 시기에는 서로 연결되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의 가족에 속한 일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가는 일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나무처럼 던져진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견디어 내는 일이지요. 그때 옆에 있는 나무는 참 소중합니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영양분을 공급해 주며 서로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모두 그런 가족이 있고 영적인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우리를 살게 한 부모가 있고 많은 경우 부모의 주검 위에서 자라며 서로 마주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미 나무에서 생명을 얻고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자랄 수 있는 땅이 되어 주시고 에수님께서는 살과 피로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Family Circle을 이루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역시 다른 새 생명을 위해 죽고 썩어 좋은 영양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한 알의 씨앗으로 남기보다 자신을 내어주고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입니다.


죽음으로써 사는 파스카의 신비가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 살아갈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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