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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안되겠다고 생각할 때

<살아있는 사람 19> 후기

11월 3일 밤 11시 50분, '이젠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째 요동치던 날씨가 이틀전부터 꿈쩍하지 않고 비올확률 60% 강수량 5밀리로 예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12년 한국에서 '살아있는 사람 8'로 마라톤을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참가했던 마라톤은 모두 시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학교 일정 때문에 11월로 변경되었다.


더욱이 마라톤을 직접 주최하는 4년차에 이르자 날씨가 팔할임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 예보는 평소에 없던 두통까지 유발하고 있었다.


결국 적벽대전을 앞두고 동남풍을 불게 했던 제갈공명이 되던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사제로 남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더는 안되겠다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1,019명! 상상을 초월한 숫자의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 19>에 신청했다. 더불어 행사진행을 위해 100여명의 봉사자가 모였으니 역대급이다.


2005년 단 두명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시작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놀랍고 은혜로울 수 밖에 없는 숫자다.


효성초 어린이부터 무학중고와 대건고등학교 학생들, 까리타스 대구사회복지회 사제들과 직원과 가족들, 범어/효목/군위성당 신자들, 하양마라톤 클럽과 더불어 수많은 일반인들이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직원과 학생들과 어울려 모두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였다.


사실 날씨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출발점에 다다랐는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았고, 세달전부터 열심히 준비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영국의 어느 시골에서 결혼하는 날, 비바람이 너무 거칠게 몰아쳐 텐트가 날아가고 음식이 쏟아지고 하객들이 대피하는 가운데에도 주인공들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11월 4일 아침이 밝았다.


이른 새벽 어둠에 날씨 앱을 켰는데 왠일인지 전날 밤까지 있던 모든 비 예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누군가 진실하게 기도했고 놀라우신 하느님께서 그분만의 방식으로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좀 더 일찍 표징을 보여주셨다면 ㅎ)


파란 하늘에 노란 은행잎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졌다. 달리는 일이 그림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자 '아~' 감탄을 자아내는 일이 되었다.


살아있는 사람 19는 모두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걷고 뛰면서 땀을 흘리며 누군가를 위한 밥이 되었다.


나는 행사 진행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10킬로미터만 뛰고 그만 둘려고 했었다. 뛰는 중간에 사람들과 인사하고 결승선에서는 식사 준비를 체크하고 시나브로 뛰었다. 아마 누구라도 나를 붙들고 뭐라도 좀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 좋은 구실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어느때보다 더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내가 가야할 길은 결국 끝까지 달리는 것, 그 길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봉사자들과 하이파이브 하는 것이었다. 잠시라도 편해지고자 했던 마음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마지막 5킬로미터 한바퀴를 신나게 달렸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 놀라우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멋진 가을날에 살아있는 사람으로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안고 어린이처럼 달렸다.


문득, 발 맞추어 같이 뛰는 이의 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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