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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따위가 있을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 앞에서

인간은 불합리함과 마주 서 있다. 인간은 내면 깊은 곳에서 행복과 이유를 갈망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욕구와 세상의 불합리한 침묵 사이의 대립에서 생겨난다.(알베르 카뮈)


우리가 공허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때, 고통스럽거나 슬픔에 잠겨 있는데도 위안을 얻지 못할 때, 불행과 불의로 견디기 힘들 때 삶의 의미를 묻는다.


쉽게 말해 삶이 결함투성이인데 그런 삶에 애초에 의미라는게 있을까? 오히려 삶은 부조리하고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는게 현실이다.


<Life is Hard>의 저자 키어런 세티야(Kieran Setiya)는 태초부터 삶의 의미가 인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노,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의 의미'를 물었지 삶 자체의 의미를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19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이 정해져 있는 종교적 세계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종교는 우주 전체를 구원하는 관점을 제시하여 삶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런데 1834년 영국 작가 토머스 칼라일의 소설 <의상 철학>에서 처음으로 '삶의 의미' 자체가 등장한다. 더 이상 종교적 세계관이 당연한 사실이 아닐 때, 삶이 고될 때 인간은 삶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졌다.


상실과 실패, 불의와 인간 고통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실이 필요했고 그것이 삶의 의미로 드러난 것이다.


'삶에 의미가 있나요?'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죠?', '죽기 전에 알 수는 있을까요?'


더 나아가 '지금 현재 상황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하고 물어보면 다들 부정적으로 말한다. 


마치 P.D.제임스의 소설 <사람의 아이들>에서 인류가 불임이 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미래가 없는 사회는 공포에 휩싸여 붕괴해 가는 것처럼 현실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은 만연한 무관심, 사회적 무질서, 절망, 사회제도 및 사회적 연대의 약화, 물리적 환경의 황폐화, 많은 활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신념의 전반적인 상실을 특징으로 하는 세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새무얼 셰플러)


하지만 위기는 선택을 만든다. 


목전에 닥친 멸종을 환영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이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끌게 두어서도 안된다. 다시 말해 위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인류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인간의 역사와 그 주체인 인류를 가치있게 여기고 가치있게 여기는 것들이 계속해서 존속해 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멸의 위기 속에서도 창의력, 연대, 연민의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고, 예술과 우정을 나누며, 어둠 속에서도 함께 휘파람을 불며 위안을 얻는 방법을 찾을 것이고, 최악의 순간이라도 기품 있게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정의 그 자체뿐 아니라 부조리의 해결책으로서도 중요하다. 불의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진실을 벼려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 즉 나머지 우주 전체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는지 알려 주는 진실은 이 세상의 정의를 향해 갈팡질팡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아가는 인간의 진보에 있다.


종교적 진리 안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단순히 죽음을 모면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죽을 운명 때문에 좌절되는 정의 실현의 가능성을 여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다.


기후변화가 식량 및 물 부족, 대규모 이주, 분쟁,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삶의 의미를 위협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 삶의 의미는 과거의 잘못을 최대한 바로잡는 정의를 향해, 예측할 수 없지만 느릿느릿 힘겹게 나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인간 역사가 그런 형태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가 불확실하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과연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는가이다. 희망으로 활기에 넘쳐야 할까, 아니면 절망으로 침울해야 할까? 


삶은 지금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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