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부수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

희망의 이중성

故이선균 배우를 떠나보내며 <고통에 대해서>라는 글을 쓸 때 꼭 희망에 대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고통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같은 것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Life is Hard>의 키어런 세티야와 함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빈둥거리며

공허한 희망만을 기다리는 바보는

먹고살 방법이 없어 푸념을 한다.

하지만 부양자로서,

희망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다.(헤시오도스)


많은 사람에게 희망은 부질없는 바람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게다가 더 많이 희망할수록 절망의 위험도 커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희망에 매달린다. 어려운 시기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매주 복권을 사는 이가 희망하는 것,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 희망하는 것, 자식을 둔 부모가 희망하는 것, 사제가 신자들에게 희망하는 것 모두는 필연적으로 절망과 같이 간다.


희망에는 바람과 믿음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은 그것을 바라는 것이면서도 필연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쇠렌 키르케고르)이다. 


그렇기에 절망은 자기가 부정한 가능성에 애착을 느낄 때 갖게 되는 것이며, 그 애착마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체념이다.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때 우리가 느끼는 상실의 슬픔은 죽어 버린 가능성에 대한 열정이 낳은 고통이다.


한 배우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일은 그 배우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기쁨과 희망에 대한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상실의 슬픔이다.


희망은 결국 자기가 통제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침묵과 공존한다. 희망하는 일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그건 희망이 낳는 실망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하는 용기다. 


일이 잘못될 때 희망은 절망보다 더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자체로 살아있다. 


내 안에 희망이 있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물어본다.


때론 상실의 슬픔과 고통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더라도 내 안의 희망과 타인의 희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라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자주 희망이 실망과 절망을 가져오더라도 희망이 있기에, 희망으로 구원(로마 8,24)되기에 우리는 계속 희망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하기를 포기하는 것만큼 절망적일 수는 없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고통에 매몰되어 벗어날 수 없는만큼 고통스러울 수는 없다.


역사가 말한다. 무덤의 이쪽 편에서는

희망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평생에 한 번은

간절히 기다리던 정의의 파도가 일고,

희망과 역사의 운(韻)이 맞는다.(트로이에서의 치유)


시인은 희망과 역사가 운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어떤 조화 속에서 그 둘이 운이 맞을지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의미 따위가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