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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부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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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이사간 딸집에 처음 방문하는 장인 어른을 맞는 심정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주교님께서 오는 9월 20일(주일)에 견진성사를 집전하러 군위성당에 오시기 때문이다. 잔듸깎기, 낙엽/화단 정리, 성당청소 등 집이 (이천평으로) 너무 크니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


매주 청소하며 늘 사용하는 성당은 그래도 괜찮은데 지난 여름 긴 장마에 곰팡이에게 습격당한 지하식당은 정말 환골탈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청소전문회사를 운영하는) '청소미남'에게 왁싱을 부탁했다. 그리고 젊고 유능한 학부모들이 손발을 걷어 부쳤다. 여름내내 집주인 행세를 하는동안 한마디도 못했던 곰팡이와 퀘퀘한 냄새를 닦고 쓸어내니 속이 씨원하다.



내친 김에 별님이 목욕까지 도전했다. 처음 군위에 왔을 때 주민신고를 하러 동사무서에 갔더니 일인가구 전입 때 주는 쓰레기 봉투 세 장을 얻은 것처럼 내가 도리어 신났다. 


첫키스, 첫눈, 첫사랑에 비길만한 첫목욕! 물에 잔뜩 젖은 젖먹이 어미의 속살이 다 드러나는 민망함은 내 살림살이 바디클렌저와 헤어드라이기를 가져 내와야 했던 내 민망함과 닮았다. 그래도 씻으니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가! 



'13일의 금요일'은 불길하다고 이야기하지만 '13일의 주일'은 길일이다. 주일이 군위 장날이기 때문이다. 오랜 전통에 따라 장터에서 사 온 닭포와 꽁치가 준비되었다. 무쇠 솥두껑을 뒤집어 숯불에 익힌 닭포와 소맥 한잔은 카스테라에 딸기우유를 마시는 것처럼 맛있다. 소금을 쳐서 숯불에 구워 먹는 꽁치구이는 인생에 쓰고 단 맛을 아는 사람이 좋아할만한 것이다. 난 닭포가 더 좋았다.



성당 뒷마당에는 맑은 하늘에 흰구름 한조각 걸려있고, 숯불 연기에 땀과 술로 번들거리며 웃는 얼굴들이 뽀얀 별님이처럼 예쁘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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