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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Sep 01. 2024

나의 구 언니

우리는 무어라 정의할 수 있나

나는 종종 운다. 특히 몸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울 때 그냥 엉엉  운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이제 겨우 개학 후 이틀째 출근인데 엉엉 울었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나 그건 핑계였다. 서러움과 그리움이 복받쳤다. 거기에 육체적 피로가 더해졌다.


새벽.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하며 엉엉 울었다. 보통 출근길 운전하면서 우는데 오늘은 빨리 터졌다. 복받쳤다. 뭐라 정의할 수 없던 기분의 이름을 찾았다. 서러움과 그리움이었다.


구 새언니는 내게 가족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딱히 뭐라 부를 수 있나. 나는 또 밀렸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내내 오빠한테 밀렸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몰랐었다. 오빠랑 워낙 친했었기에 오빠가 있다는 게 그저 좋았었다. 오빠가 많은 부분을 채워줬기 때문에 엄마의 세계가 오빠뿐인 것도 괜찮았다.


오빠는 스스로 인정했었다. 내가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더러 많은 걸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받은 만큼 하자. 오빠가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해 주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오빠 껌딱지였다. 우리는 현실 남매가 아니었다. 오빠와 함께하는 건 뭐든 좋았었다. 천재적이었던 오빠는 모르는 게 없었다. 공부 방법부터 시사 경제 정치 상식까지 난 모든 걸 오빠에게서 얻어냈었다.


엄마에게 오빠는 전부였다. 물론 나도 사랑하셨겠지만 언제나 오빠 다음이었다. 오빠는 손에 물을 묻히면 안 됐고 나는 손에 물을 묻혀야 했다. 나는 딸이었고 오빠는 아들이었다. 그러려니 했었다. 괜찮았다. 나는 오빠가 우선인 환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예쁜 딸이고 오빠는 의지할 수 있는 장남이겠거니 했다. 내게도 오빠는 친구이자 오빠였고 선배이자 동료였다.


우리의 환경이 적나라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오빠와 내가 각자 결혼한 후였다. 오빠는 더 이상 나보다 많은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남편은 엄마의 차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아들과 딸이 다른데 왜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이 오빠와 다르지 않은가? 나는 피곤했다. 남편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힘들었다. 새언니와 남편은 기싸움을 하는 듯했다. 서로 밀리지 않는 팽팽함이 눈에 보였다.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병원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지 한 달 반 만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큰 슬픔과 멘붕에 빠졌다. 남편은 남편대로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힘들어했고 엄마아빠는 이 짓물렀고 어린 조카들은 멋모른 채 혼란에 빠졌다.


새언니가 재혼을 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난 지 삼 년쯤 됐을 때였다. 언니의 재혼 소식을 듣고 엄마는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언니는 재혼을 선전포고하고 카톡 프사에 가족사진을 올렸다. 단란한 네 명의 가족사진이었다. 원래부터 너무 행복했을 거 같은 예쁜 가족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빠는 원래 없었던 사람 같았다. 모르는 아저씨가 애들 아빠로 자리 잡았다. 엄마와 언니는 카톡으로 아이 돌봄 일정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나는 언니에게 나름 공손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족사진만 좀 내려 달라고. 부모님께 시간을 달라고. 사실 시간은 내가 필요했다. 그 사진을 보기가 힘들었다.


메시지를 씹혔다. 그러나 다음 날 프사가 바뀌긴 했었다. 나중에 내 요청이 불쾌했었다는 언니의 심정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나도 기분이 나빴다. 요청도 나도 씹힌 기분이었다. 친정에 갈 때마다 조카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구 언니가 재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친정에 우리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구 언니가 애들을 데리러 온다는 소릴 듣고 나는 엄마한테 마주치기 싫다고 했다. 메시지를 씹혔고 내가 씹힌 마음이 풀리지 않은 때였다. 엄마는 구 언니도 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 들어오고 밑에서 전활 할 거라고 했다. 그렇구나. 안심했다. 그런데 구 언니는 전화는커녕 벨도 누르지 않고 친정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결혼 후 나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기가 막혔다. 나란 존재가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조카들이 클 때까지 한 번도 우리 가족이 단란하게 친정 부모님과 보내본 적이 없었다. 어떤 날은 조카들이 있는 게 힘들었다. 애들은 어렸고 나의 애까지 우리 부부는 언제나 애 셋을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엄마가 편찮으신 날도 조카들이 있었다. 물론 구 언니는 없었다. 코로나가 극성이어서 극도로 조심할 때도 조카들은 있었다. 조카들은 우리가 갈 때마다 있었다.


엄마의 손주 사랑은 대단했다.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친손주와 외손주가 다르다는 말씀을 직접 해 버리셨고 언니는 재혼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나의 친정을 드나들며 당당히 아이들을 맡겼다.


조카들이 컸고 부모님 댁 방문 횟수가 줄었고 우리도 줄면서 이제는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엄마의 친손주 사랑은 더 커졌다. 부모님 생신도 당연히 구 언니는 챙기지 않았다. 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넘어서 이제 구 언니가 재혼한 지도 7년이 넘은 며칠 전 나의 사촌동생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예식장에 갑자기 구 언니가 나타났다. 나의 친정 엄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단다. 남편은 어이없어하면서 구 언니를 무시하며 피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가 부모님을 모시고 왔는데 애들과 함께 온 구 언니가 부모님 옆에 딱 붙어서 인사를 다녔다. 엄마는 사촌동생 결혼식 가족사진을 내 아이와 남편은 찍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친손주 들은 찍어야 한단다. 기가 막혔다. 우린 왜 왔지.


구 언니는 여전히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나는 애들 고모이지만 아가씨는 아니었다. 구 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재혼을 해도 아무 때나 들이밀 수 있는 곳이구나. 엄마는 손주들이 와서 좋으셨다. 우리 손주가 사춘기가 돼서 뭘 잘 먹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한 접시 가득 가져가던데..라고 나는 투덜거렸다.


엄마에게 나는 조카들에게 관심 없는 매정한 고모일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엄마는 구 언니가 고맙다 하셨다. 아이를 키워주고 있고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구 언니 근거리에 사셨다. 차마 손주들과 멀어질 수 없으셨다. 부모님과 구 언니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듯했다. 딸보다 가까운 건 아닌지.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나에게 구 언니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친했으나 멀어진, 다른 세상 사람이다. 내겐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건 고마운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구 언니가 조카들을 키우는 게 뭣이 고맙단 말인가.


구 언니는 나의 가족 결혼식에 화려하게 등장하여 보란 듯이 누비고 다녔다. 내게 말하는 듯했다. 오빠가 없어도 오빠 아들이 있어. 넌 절대 네 엄마에게 우선일 수 없어.


우선이길 그토록 바랐었나. 엄마의 사랑이 고팠었나.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그런데 친손주에게 밀리는 내 아들의 위치가 나를 못 견디게 했다. 엄마에게 딸보다 편해 보이는, 사위보다는 확실히 편한 구 언니가 싫었다.


구 언니의 등장으로 예상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괜히 서러웠고 오빠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2024.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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