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끊긴 자리에서
“언니, 오랜만이야.”
“어, 그러게? 잘 지냈어?”
“응, 언니 교사 됐더라? 역시 집이 사니까 교사도 되고, 부럽다.”
오랜만에 걸려온 대학 동기 한나의 전화였다.
희유는 금세 마음이 상했다. 한나는 대학 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희유의 노력은 보지 않았고, 노력할 수 있는 여건만 부러워했다.
짧게 통화하고 끊었다.
“한 번 보자.”라는 인사치레만 몇 년째 주고받고 있다.
“희유 쌤은 스트레스 어떻게 풀어요?”
“저요? 그냥 친구랑 수다 떨거나, 맛있는 거 먹어요.”
김 선생의 질문에 희유는 자신을 돌아봤다.
언제부턴가 친구와의 수다가 어려워졌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적었고,
이제는 말로 감정을 푼다는 게 상대에게 미안한 일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받아주는 친구도 점점 줄었다.
희유는 입이 무겁지 않으면서도 속이 뒤집혔고,
살아온 흔적이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다.
줄어드는 친구의 수만큼
희유는 자신이 잘 살지 못한 사람 같다고 느꼈다.
대학 동기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가끔 안부를 물으며 빈정거리는 한나의 전화만 받을 뿐이다.
한나는 희유의 첫 번째 대학 동기였다.
그 시절 친구들 대부분은 희유의 편입과 대학원 진학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희유는, 부모를 잘 만나 편입할 수 있었고
교수 인맥 덕분에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에 불과했다.
단계를 밟을 때마다 친구들의 반응이 서운하고 씁쓸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편입한 두 번째 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넌 학교를 이 년씩만 다니네. 뭐가 남겠어?”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몇몇 친구들과는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가깝다고 믿었다. 하지만 졸업 후,
서로 삶에 치이다 연락이 모두 끊겼다.
'우리의 우정이 이 정도였구나.'
주로 먼저 연락하다 지쳐 끈을 놓았던 희유는 스스로 놀랐다.
대학원 동기들은 달랐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끼리라 그런지 조금 더 끈끈했다. 졸업 후에도 오랜 시간 감정을 나누며 의지했다.
희유는 답답하거나 심심할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대체로 희유가 말을 하는 쪽이었고,
대체로 상대는 듣는 쪽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도 리턴 콜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특별한 용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수업을 마치고 나서 보니 남편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희유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남편 유영은 일과 시간에 절대 전화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응, 수업 중이었어?”
“응. 무슨 일이야?”
“나 안 다쳤어. 놀라지 말고 들어. 외근 갔다가 오는 길에 접촉사고가 났어. 차는 수리 맡겼는데, 내일 찾을 수 있대.”
“다행이다, 안 다쳐서. 상대 과실이야?”
“그렇지 뭐.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정시 퇴근 가능해? 상갓집 좀 가야 해서 네 차 좀 쓰려고.”
“응, 정시 퇴근할 거야. 써.”
“그래, 이따 봐.”
역시 용건만 간단히.
전화의 쓰임을 매우 경제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희유는 피식 웃었다.
퇴근길에 대학원 동기 미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장학습 후 남은 롯데타워 전망대·아쿠아리움 학생 이용권 두 장이 생겼다.
아들 신이와는 일정이 맞지 않았고,
이미 여러 번 다녀온 곳이라 미지에게 주려 했다.
초등학생 두 명을 키우는 전업주부인 미지에게
안성맞춤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째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미지는 희유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등기로 보내 주려면 주소를 알아야 했는데,
오늘도 실패였다.
운전이 끝나면 메시지를 남겨야지 생각했다가
집에 도착하면 잊었다.
저녁을 차리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뭐든 까맣게 잊혔다.
다음 날 이용권을 보니 유효기간이 촉박했다.
오늘 보내야 내일 도착하고, 그래야 모레 쓸 수 있다. 공강 시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언니. 나 이따 전화할게. 미안.”
뚝—
귀에서 끊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남았다.
그러려니 했다.
퇴근길에 떠올라 확인해 보니,
미지에게서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렇게 티켓을 날렸다.
희유는 문득
자신이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 들었다.
별일 없이 전화를 자주 하다 보니
이제는 늘 ‘별일 없는 전화’가 되어 버렸다.
진짜 용건이 있었는데,
그 용건이 사라졌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희유는 씁쓸히 메시지를 남겼다.
[잘 지내지? 롯데타워 입장권이 있어서 보내주려 했어. 통화가 계속 안 돼서 못 보내주다가 기한이 끝나버렸네. 앞으론 용건 있을 때만 전화할게. 받아.]
문자를 보내고도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제, 정말 아무 일 없는 전화는 없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