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이라는 것은 어쩌면 상대적인 것이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공동체가 묵인할 때, 개인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을 내가 지속적으로 당할 때는 더더욱 그러한 듯하다. 그토록 무감해진다.
중학생 시절이었나. 조금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옷을 빨아 입지 않았고 몸을 씻지 않았다. 흰색 패딩은 어느새 회색이 되었고 머리는 떡이 지다가 갑자기 윤기가 흘렀다. 그 친구에게서 어떤 냄새가 났다. 친구들은 그 친구를 멸시했고 외면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커터 칼을 들고 자살하겠다고 친구들에게 겁을 주었음에도 친구들은 꿈쩍하지 않았고 되려 친구들이 단합하여 눈물로 담임선생님께 그 친구 때문에 불편했던 경험을 하소연했었더랬다. 나는 방관자였다. 같이 따돌림을 당할까 겁이 나서 그 친구에게 손 내밀지 않았고 내 친구들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러다 소름이 돋았다. 내 친구들이 눈물로 담임선생님께 하소연하는 걸 보면서 집단이 한 명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배웠다. 사지가 떨렸다. 처벌을 피하기 위한 악마의 눈물. 결국 특별한 친구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조용히 그 학년을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결국 본능적으로 내 친구들과 거리를 두었다.
<가리는 손>을 읽으며 나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제이는 아이들의 차별적 언어를, 어쩔 수 없는 소외감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한국에서 자라고 싶어서 자라는 게 아닌데,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많은 걸 감내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무리에서 서열을 만든다. 그러면서 선봉에 서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도 하지만, 자기보다 세거나 약한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자리매김을 한다.
내 아이가 여섯 살 때, 놀이터에서 처음 보는 친구들과 빙 둘러서 노는데 그들과 함께 대장부터 정하는 것을 보고 뜨악했던 적이 있다. 제이는 자리매김에서 밀렸을 것이다. 다문화, 더해서 한부모 가정이라는 꼬리표가 제이를 줄기차게 괴롭혔을 것이고 본능적으로 언감생심 대장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불량 청소년과 그들을 훈계한 노인과의 싸움의 현장에서 제이는 인형 뽑기를 한다. 인형 뽑기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무언가를 낚아서 갖는다는 것. 성취감을 거기서 찾은 것일까. 아니면 친구가 없어서 할 수 있는 놀이가 그뿐이었을까. 제이는 인형 뽑기에 진심이었다. 난리가 일어나는 통에도 인형 뽑기를 했고 두고 온 인형을 가지러 다시 현장에 갈 정도였다. 그 현장에 제이를 있게 할 장치에 지나지 않나. 궁금증이 일었다. 제이는 비명을 질렀어야 맞다. 폭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무서움을 느꼈어야 했고,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입을 가린 제이의 표정이 어쩌면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설의 내용이 소름을 자아낸다.
상식이 사라지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에 소름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노인과 아이들의 싸움에서 노인은 단순히 피해자이기만 한가.라는 질문도 이 책은 던지고 있다. 노인도 힘에 부친 상태에서 여자애만을 노리고 공격한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인가.
<가리는 손>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차별을 있는 그대로 고발한다. 김애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있을 법해서 기분마저 찝찝하다.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고민이 된다. 혐오가 난무한 세계에서 혐오는 특별하지 않다. 그것을 입을 가린 채 웃는 어린 제이가 증명해 주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본능만으로 살지 않는다. 무리 짓고 서열화하지만 우리는 그 무리 속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중학생의 나는 방관자였다. 무서웠고 어렸다. 내가 피해자가 아닌 것에 안도했다. 안 씻고 안 빤 옷을 입고 다니는 친구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합리화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어른이고 교사이다. 방관자일 수 없고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이 사회를, 혐오에서 지켜야 한다. 상식을 지켜야 한다. <가리는 손>이 내게 묵직한 메시지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