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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Aug 03. 2023

표현 중독

표현하지 못했을 때 오는 후유증

"너는 베이지(Beige)랑은 거리가 먼 거 같아. 호불호가 너무 강하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 그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햇빛이 아름답게 창살에 비춘 그날, 섹시한 인디고와 금색 장식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자카르타 시내의 한 바에서 마티니를 한잔씩 시켜놓은 채 서로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저 소리를 했다.


그래서 내가 마음에는 든다는 아리송을 말로 말끝을 흐린 채 보드카 마티니잔을 치켜세우며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또다시 응시했다. 나는 또 왜 갑자기 그의 시선이 부끄러워 이내 시선을 피해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니, 나는 표현(Express) 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의례 동양인들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해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불평하는 서방세계의 사람들의 볼멘소리를 종종 듣고 하는데, 나는 눈썹부터 입꼬리까지 그리고 눈가의 근육을 모두 세세하게 이용해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기대감에 벅차서 시킨 음식이 정말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맛이 없거나, 특히 식감이 이상하면, 나는 토사물을 만들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움켜쥐지만 미간을 지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두 눈동자의 초점은 흐린 채 오른쪽 왼쪽 눈썹의 방향을 제각각 다르게 배치하며, 이마의 근육을 연신 움직인다. 그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끝내 오기로 집어삼킬 때까지.


또 누군가와 억지로 상호작용을 하고 얼굴을 봐야 하는 자리에서는 '세상 다 끝난 표정'을 지으며, 시무룩도 아닌 그렇다고 불쾌한 것은 아닌데, 누가 봐도 도살장에 끌려 나온 소가 슬픔보다는 '망했다'는 느낌으로 하염없이 반추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는데, 어렸을 땐 그게 내 눈치를 보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표정을 짓곤 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주변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정도의 사회학습을 거쳤기에, 입으로는 챗봇처럼 '아 즐거운데요. 괜찮습니다.'따위의 말들을 뱉어내지만, 누가 봐도 한국사회에매우 중시하는 '눈치'가 있는 무리들이라면 속한 모임이라면 내 표정을 알아챈 순간부터 그 어색하기 짝이없는 모임을 해체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모임 종료의 명분을 찾기 바쁘다. 태생이 이기적인 나로서는 굳이 나말고도 알아서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모임을 파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제발 좀 빨리 모임이 끝나라고 연신 기도할 뿐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는 바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는 인간들이 내 주위에서 비이성적이고 천박한 소리를 지껄일 때다. 그럴 때마다 내 두 눈동자를 연신 굴려대며, 의식적인 간질을 하듯 눈에 흰자를 수차례 드러내고, 왼쪽 눈과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비웃는 표정을 짓곤 한다. 사람을 비웃는 것에 일가견이 있기에 어쩌다 내 표정을 캐치한 사람은 하나같이 내 말 또는 행동보다는 '표정'을 문제 삼으면서 '네가 얼마나 잘나서 나를 무시해?' 같은 멍청하기 짝은 소리를 항변이라고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 비웃는 표정은 그 농도가 짙어서 어떨 땐 상대방의 꼭지를 돌게 만들 때도 있다.


그렇다. 나는 포커페이스 따위는 전혀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이다. 매 순간 표현을 하지 못하면 내 안에 그나마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하루를 용케 살아가고 있는 영혼이 씨앗이 메말라감을 느낀다. 표현의 방식이 표정이 되었든, 글이 되었든, 키스가 되었든 혹은 그 이상의 물리적 뒤엉킴이 되었든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마치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가스불 위에 올려놓는 주전자가 끓는점 섭씨 100도에 다다라 미친 듯 '삐' 소리를 내며 뜨거운 불구덩이를 감내한 채 목놓아 울고 있는데, 이를 알아주지 못한 미련한 주인이 결국 방치하여 주전자 몸통에 있는 물이 다 말라버리는 것처럼, 나는 '삐' 소리를 이따금 내어주어야만 한다. 안 그럼 물이 말라 결국 다시는 쓰지 못해 불구덩이에서 타버린 주전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요즘은 이상하게 그의 얼굴이 잘 생각나진 않는데, 그가 했던 말들이 가끔 생각나곤 한다. 이를테면, '너는 베이지랑은 거리가 멀어.'따위의 말들이다. 갑작스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든 그와 나는 이성을 되찾아 대다수의 시간을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서로를 보지 못하는 시간에는 서로를 찾지도 않는다.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단순한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사이니깐. 그래도 나보다는 그가 훨씬 더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시선을 신경 쓰는 사회적 동물에 가깝기 때문에 평소엔 내 생각 따위도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이것이 씁쓸하거나 손해 본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병적으로 해대는 표현의 빈도를 줄이게 해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내가 하는 모든 표현들이 부디 그에게만큼은 아름다운 하나의 점으로 남길 바랄 뿐인데, 그것도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요즘 들어 자꾸만 그의 얼굴이며 그와 지냈던 불같은 찰나의 시간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어떨 때는 잘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마치 그와 있을 때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 데서 오는 후유증인 것 같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오는 패배감 그리고 좌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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