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월의 앤 Aug 07. 2023

왼손잡이를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난다.

오늘 2년 동안 나랑 별로 교류가 없던 직원분이 한국으로 귀임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오늘 항상 꼿꼿했던 그분이 내게 내민 손이 왼손이라는 것을 2년 만에 처음 알았다. 나는 당연히 준비했던 오른손을 흠칫 뒤로 젖히며 왼손으로 역할을 일임하며, 말했다. "왼손잡이셨군요."  


그리고 몇 분 동안 왼손잡이었던 그가 생각났다.

펜을 잡고 무언가 메모를 할 때, 포크와 나이프를 쥘 때, 차문을 열 때도 그는 왼손을 주로 사용했다.

생각해 보니 나랑 손을 잡고 걸을 때에만 그는 오른손, 나는 왼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곤 했는데, 이 기억 때문인지 나는 그의 얼굴 왼 면보다는 오른 면을 보는 게 오히려 익숙했던 것 같다.  


한 번은 그에게 물었다.

"왼손잡이면 안 불편해?"

"아니, 별로. 왜 불편해 보여? 아니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왼손잡이를 많이 본 적이 없어서. 좋아. 왼손잡이, 흔하지 않잖아. 매력적이야."


이 대화는 정확히 3년 반 전 멘뗑이라는 자카르타 북쪽 시내를 걸으면서 나누었는데, 그때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차도에 가깝게 걷고 있던 내 방향을 바꾸려고 가로등도 없는 그 깜깜한 밤에 불필요한 무단횡단을 했다. 촌스러운 네온사인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와 형형색색의 빛, 자동차 라이트 뿐인 그 비좁은 도보에서 내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왼손으로 슬며시 쓸어내리며,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왼손잡이를 소재로 나눈 단 1분의 대화 때문에, '왼손'을 볼 때마다 이상스럽게 에로틱하면서도 애잔 한 기억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다.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매력적인 하나의 요소가 추가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왼손잡이들을 보면 그가 기억나는 것은 어느덧 디폴트가 되어버렸다.


그날 이후 느닷없이 왼손잡이들 볼 때마다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냥 상대방의 특정 부분을 닮고 싶은 게 인간의 습성이라 그런지, 가끔 나도 왼손으로 연필을 쥐거나 포크나 숟가락은 일부러 왼손으로 쥐며 연습 아닌 연습을 하곤 했다. 지금은 더 이상 이 미련한 짓에 연습이란 말을 덮어씌우지도 않지만.


최근 이틀 만에 뭐에 씌운 듯 단숨에 읽은 "H마트에서 울다 (2021년작, 미셸 자우너 지음)"에 글쓴이가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질 때는 예정 없이 온다고 기술한 부분이 있다. H마트에서 지은이처럼 장보고 있거나 분식을 먹는 아무런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호작용들이 눈에 들어오거나 갑자기 어떤 재료들을 볼 때마다 '엄마'가 생각나서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엄마랑 많은 추억을 나누었던 'H마트(혹은 동양 슈퍼마켓을 통칭하는 하나의 큰 비유적 범주)에서 울다라고 했구나.'란 나름의 깨달음과 함께,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기억이 나는 행동은 불현듯 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단 생각에 휩싸일 뿐이다. 나의 싸구려 애정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처절한 슬픔으로 표현한 저 애틋한 문장을 마치 모욕하는 것 같아 동일시할 수 없지만, 나 역시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가 생각난다. 그 또한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날에 나타나거나 연락을 한다.


그를 만나도 딱히 할 말은 없어서 우린 말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다. 그리고 같이 있는 시간에도 서로를 염탐하느라 바쁘고, 같이 있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무언의 노력을 수없이 했다. 아니 매번, 그를 만났을 때마다 매번 그렇게 시간을 보낸 거 같다. 말소리는 거의 없이 최대한 그의 왼손과 나의 오른손의 오랜 접촉을 통해 서로를 느끼곤 했다.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질없는 사이니깐,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의 파괴적인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그런 그와 나였으니.


어떨 땐 더 이상 왼손잡이를 잠깐이라도 보지 말게 해 달라고 보이지 않는 영혼에게 애원한다. 그를 생각나게 하지 말아 달라고. 그러면서도 다른 파편 속에서 투영된 그의 모습들, 이를테면 그의 습관들을 타인을 통해서 발견하거나 할 땐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 위에 부서진 난파선을 가까스로 붙잡고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채찍질한다. 하지만, 일렁이는 파도 위에서도 살길보다는 추억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 행위를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느끼고 있으니,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을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과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편안한 대상을 '배우자'로 삼나? 란 생각도 든다.


나에겐,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그', 그리고 그 역시 나를 감당하기에 여러모로 벅찰 것을 충분히 알기에, 우리는 서로를 소유 그리고 억압하는 대신 놓아주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다가 가끔 그는 또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연락이 오겠지. 보고 싶다고. 우린 타이밍이 완전히 망쳐놓은 사이니깐, 타이밍의 저주에 또 한 번 알면서도 갇혀 서로를 탐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끝내 헤어지면 또 그리워하고, 그러다가 중력을 거스르는 기회가 주어지서로의 얼굴을 한번 더 쓰다듬는 시간을 가지려 몸부림을 칠 거라. 그리 믿는다.


왼손잡이를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나는 건 이제 어쩔 수 없는 하나의 그리움의 기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