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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Jul 11. 2023

이별을 위한 전주곡

타인과의 이별을 위한 나만의 결의랄까.

36번째 생일선물로 좋아하는 선배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단순한 열정 (Simple Passion)'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1990년대초 프랑스에 주재하던 동구권(소련) 외교관과의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은 불륜관계에 관해 작가 본인의 고통과 감정을 담담하지만 강렬하고 단순하지만 복잡한 문체로 담아낸 작품이다. A라는 유부남과 작가가 어떻게 만났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그런 책이 아니라 온전히 A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책이다 -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래서 작가는 A에 대해 최대한 노출을 꺼리며, 이렇게 서술했다.

"A는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엔가 살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존재의 이유로 선택한 것이지 책의 등장인물로 삼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니다 (원주)"


나는 요즘 무엇을해도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마치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완전히 파괴되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것만 같은 이상한 공포감이 밀려온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완전히 까먹었다. 그리고 애착의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해서 대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의 관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상하게 그 누구도 그립지 않다. 누구를 정신적으로 사랑하지만 육체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탐하는 일부의 비윤리적인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무엇인지 안해봐도 알만큼 나는 표면적으로는 위태롭고 내면적으로는 변태적인 희열을 느끼지만 그 안에 나를 파괴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자카르타의 7월은 유난히 덥고, 연무가 하늘을 가득메우고 있다. 하지말라는데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화전때문인건지, 지열때문인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런 날씨가 꿉꿉하고, 내 마음 또한 꿉꿉함 그 자체다. 이 징그럽고 더러운 느낌. 그래도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큰 사람이라 그런지 내가 더럽거나 징그럽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나는 매혹적인 사람을 좋아하기에 나 자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래서 일부러 크지도 않은 눈을 지그시 뜰때도 있다. 마치 티모시 샬라메처럼. 티모시 살라메같은 퇴폐미가 너무 섹시해서 내 얼굴에도 일부 장착되면 좋겠다는 웃기는 바람과 함께, 나는 내 얼굴이 슬프지만 매혹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자지만, 남성의 섹시함을 동경한다. 그래서 가끔은 그들처럼 수트를 입고, 슬픈 얼굴을 그려보기도 한다. 혼자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창밖에 비춘 얼굴을 바라보며 더욱 더 슬픈 얼굴로 변하라고 주문을 하기도 한다.


나는 윤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위험한 생각을 자주한다. 그리고 궁금증 해소가 더 시급하기에 하지말아야할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사는 동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다 느껴보자는 이상한 욕심을 갖기도 한다. 충동적인 내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이 충동성이 현재의 슬픈 자아가 온몸에 물감처럼 베게 한것만 같아 군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내가 싫지만은 않다. 그래도 가끔은 카르마가 무서워 신이 나에게 벌을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이분법이 소름돋을만큼 가능한 그런 냉혈한이기도 한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기까지 하다. 나에게 이런 이상한 감정들을 선사해준 내 인생 스토리의 여러 등장인물에 대해서 나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마치 아니 에르노처럼, 그녀의 세련되지만 또렷한 문장은 내가 가진 재능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순간에 대한 상세한 기록정도는 나도 잘 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이 솟구친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으면서 A를 생각하고 기다리는 그녀의 고통이 객관적으로는 아름답지만 공감할 수는 없었다. 나같으면 기다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기다리는 시간도 왠지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보다 훨씬 짧을 것 같아서. 내가 누굴 만난다면 호기심 충족이 상대방에 대한 애착 그리고 그리움보다 더 클 것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될 그런 인간으로 커버린 것이다. 호기심이 충족되면 이내 시시해져서 상대방에 대한 기억 그리고 탐을 더 이상 갈구하지 않은채, 기억의 소각장으로 이동시킨다. 기억이 소각되는 그 과정은 나름 고통스럽지만, 나는 그정도로 감정에 대해 이기적인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한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하지만 미치도록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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