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또다시 '참주' 트럼프를 목격하는가?

트럼프와 윤석열은 참주제의 원인이 아니라 민주제의 결과다

by Francis Lee

우리는 지금 트럼프와 윤석열에게서 참주의 얼굴을 보고 있다. 그 얼굴은 더 이상 고대의 독재자나 군복 입은 쿠데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정장을 입고, 선거를 통해 등장하며, 헌법을 입에 올리고, ‘국민’과 ‘자유’라는 말을 남용하는 얼굴이다. 이 새로운 참주는 총칼이 아니라 언어로, 법의 형식을 빌려, 민주주의의 절차를 통과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도널드 트럼프와 윤석열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등장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통치 방식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제도를 존중하지 않고, 권력을 개인화하며, 반대자를 적으로 만들고, 비판을 음모로 치환하고,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은 스스로를 참주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수호자’, ‘법치의 상징’, 국가 정상화를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로 자임한다. 그러나 참주는 언제나 그렇게 등장해 왔다. 참주는 스스로를 폭군이라 고백하지 않는다. 그는 늘 ‘질서’와 ‘안정’, ‘국가’와 ‘국민’을 말한다.

문제는 이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조건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개인의 성격, 도덕성, 무능, 혹은 악의를 문제 삼는다. 트럼프는 무례했고, 윤석열은 무능했다는 식의 평가는 분노를 표출하는 데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설명으로서는 무력하다. 이런 설명은 항상 같은 질문 앞에서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에는 다른 얼굴의 참주가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답은 분명하다.


“없다!”


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의 증거를 축적해 왔다. 히틀러는 선거로 집권했다. 무솔리니는 대중의 열광 속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외부에서 침입한 존재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언어를 사용하며, 민주주의의 절차를 밟아 등장했다. 그리고 트럼프와 윤석열 같은 오늘날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정확히 그 계보 위에 서 있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문제는 인간이 자유를 다루는 방식이다.


플라톤은 이미 2,400여 년 전에 이 장면을 정확히 묘사했다. 민주정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그러나 자유가 절대화되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를 통제할 기준을 잃는다. 권위는 억압으로 간주되고, 전문성은 엘리트주의로 비난받으며, 모든 판단은 ‘각자의 생각’으로 환원된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자유는 더 이상 공동의 규범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언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사실 플라톤이 두려워했던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경계한 것은 대붕의 무지와 욕망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곧 중우정치였다. 중우정치의 특징은 단순하다. 가장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가장 깊이 사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즉각적인 분노를 대변하는 사람이 지지를 얻는다. 이렇게 민주정은 점차 스스로를 소모시키고, 시민들은 혼란과 피로 속에서 결국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자유도 좋지만, 이제 누가 좀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


이때가 바로 참주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트럼프는 ‘워싱턴의 기득권 세력을 청소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석열은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겠다.’고 말했다. 이 말들은 그 자체로는 그럴듯하다. 문제는 그 말이 자기 자신을 법 위에 놓는 논리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참주는 제도를 싫어한다. 제도는 느리고, 복잡하며, 자신의 의지를 즉각 관철시키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주는 법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법을 무력화하고, 헌법을 언급하면서 헌법 정신을 훼손한다.


트럼프는 선거 결과를 부정했고, 패배를 음모로 돌렸으며, 의회와 사법부를 ‘국민의 적’으로 공격했다. 윤석열도 마찬가지로 비판 언론과 야당을 국가의 방해물로 규정하고, 검찰 권력을 개인적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정치적 책임을 제도 탓으로 돌렸다. 이 모든 행위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권력의 비인격화가 아니라, 권력의 극단적 인격화다. 국가는 사라지고 ‘영도자’만 남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신뢰의 체제라고 말한다. 시민이 시민을 신뢰하고, 시민이 제도를 신뢰하며, 제도가 권력을 위임받아 작동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근대를 통과한 정치사상의 핵심 교훈은 현실이 이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역사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정치는 신뢰가 아니라 불신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으며, 권력은 반드시 남용되고 부패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았다. 그는 플라톤처럼 철인, 곧 이상적인 인간에게 통치를 맡기는 대신, 현실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냉정하게 직시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며, 공공선을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따라서 정치의 과제는 도적적으로 완벽한 철인, 덕을 완전히 갖춘 영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덕 없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어도 한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혼합정체(πολιτεία)의 핵심 논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제3권 7장(1279a25–1279b10)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ὀρθαὶ μὲν οὖν πολιτεῖαι τρεῖς, βασιλεία καὶ ἀριστοκρατία καὶ πολιτεία. αρεκβάσεις δὲ τούτων τυραννὶς μὲν βασιλείας, ὀλιγαρχία δὲ ἀριστοκρατίας, δημοκρατία δὲ πολιτείας.


번역하면 대략 이렇다.


“따라서 정당한 정체는 세 가지가 있다. 왕정, 귀족정, 그리고 폴리테이아다. 이에 대응하는 타락한 형태로는 왕정에서 벗어난 참주정이 있고, 귀족정에서 벗어난 과두정이 있으며, 폴리테이아에서 벗어난 형태로 민주정이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를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곧바로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폴리테이아(πολιτεία)를 단순히 ‘정체 일반’이 아니라 규범적 의미의 바람직한 ‘혼합정체’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혼동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현대적 오독에 빠지기 쉽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정치의 한계를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罪性)에서 찾는다. 정치권력은 인간의 자기 사랑을 증폭시키며, 어떤 정치 체제도 완전한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를 구원의 도구로 삼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된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신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위험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국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비극적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이 통찰은 중세 교황권의 폭주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왜곡된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세속 권력을 견제하겠다는 명분으로 교황권을 절대화했고, 그 결과 교회는 또 하나의 참주가 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은 세속 권력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때 분명해진다. 권력이 자신을 비판할 외부 기준을 잃는 순간, 그것은 반드시 폭력으로 변한다.


근대 헌법주의는 이 모든 실패의 잔해 위에서 탄생했다. 로크, 몽테스키외, 매디슨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통치자의 선의에 기대지 않았고, 시민의 도덕성에 낭만을 품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최악을 전제로 제도를 설계했다. 그래서 탄생한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고, 서로 견제되어야 하며, 누구도 최종 판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곧 삼권분립의 원칙은 이상이 아니라 불신의 제도화를 추구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21세기의 인간들도 여전히 메시아, 곧 ‘구원자’를 기다린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복잡한 제도 대신 단순한 결단을, 느린 민주주의 대신 강한 리더십을 갈망한다. 트럼프와 윤석열은 바로 이런 평범한 시민들이 형성한 집단 욕망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이미 사회가 타락하여 참주가 나오는 것이지 참주가 나와서 사회가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할 때, 시민이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참주는 언제든 다시 등장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가? 그 답은 민주주의를 더 신성화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덜 믿는 데, 인간을 덜 신뢰하는 데, 그리고 권력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데 있다. 구원자를 거부하는 정치, 실패를 전제로 한 제도, 그리고 자유를 책임으로 다시 묶는 사유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참주를 비난하면서도 다시 선택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참주는 언제나 혼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군중을 등에 업고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참주는 시민의 실패를 대신 짊어진 존재가 아니라, 시민의 욕망이 응결된 형상이다. 그렇기에 참주를 비난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 비난은 곧 우리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럼프와 윤석열을 비난한다. 무책임하다고, 오만하다고,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비난은 종종 하나의 면죄부처럼 작동한다. 모든 책임을 지도자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그런 자를 지도자로 선출한 우리는 스스로를 무죄로 만든다. 민주주의의 실패를 단순히 ‘잘못 뽑은 대통령’ 문제로 축소하는 순간, 민주주의 자체는 심문대에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보자. 트럼프와 윤석열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예외가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하면 이런 인물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 없는 낙관에 가깝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일정 단계에 이르면, 곧 시민이 정치적 피로에 빠질수록, 제도가 복잡해질수록, 삶의 불안이 누적될수록, 참주의 유혹은 더 강해진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민주주의 피로증(democratic fatigue)이다. 민주주의 피로증은 단순한 정치 혐오가 아니다. 그 핵심은 민주적 절차(선거, 토론, 합의, 타협)에 대한 지속적인 피로감, 민주주의의 느림, 비효율성, 끝없는 갈등에 대한 탈진감, 민주주의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지는 정서적 탈진 상태가 겹쳐져 있다. 곧 단순히 ‘정치가 싫다’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계속 견디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에 가깝다.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고된 체제다. 그것은 시민에게 끊임없는 판단을 요구한다. 타인의 의견을 듣고, 복잡한 정책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당장의 감정이 아니라 장기적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편리하지 않다. 느리고, 불확실하며, 종종 답답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을 시민에게 되돌려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시민은 지친다. 정치는 점점 전문화되고, 언어는 난해해지며, 선택지는 늘어나지만 확신은 줄어든다. 그 결과 시민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소비자가 된다. 정책은 상품처럼 평가되고, 후보는 브랜드처럼 소비된다. 복잡한 설명보다 간단한 구호가 환영받고, 구조적 분석보다 분노의 표출이 더 빠른 반응을 얻는다.


그런데 트럼프와 윤석열 같은 참주는 이 피로를 정확히 읽는다. 그는 말한다. “복잡할 것 없다.” 그는 약속한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는 유혹한다. “너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참주의 가장 위험한 매력이다. 참주는 시민에게 정치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다. 시민은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가 되기를 포기하는 대신, 판단을 대신해 줄 강한 타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순간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성숙을 전제로 하는가, 아니면 시민의 미성숙을 관리하는 체제인가?”

고대 그리스 이래 이 질문은 반복되어 왔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시민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중산층과 제도의 균형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성을 이유로 정치에 구원의 역할을 부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사유의 계보는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전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이 요구를 점점 낮추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시민을 교육하기보다는 만족시키려 했고, 판단을 요구하기보다는 선택지를 단순화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점점 감정에 반응하는 체제가 되었고, 정치인은 정책가가 아니라 감정 관리자, 혹은 분노의 대리인이 되었다.


트럼프의 정치 언어는 이 감정 정치의 전형이다. 그는 복잡한 정책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적을 만들었고, 분노를 조직했으며, 자신을 그 분노의 유일한 해소 통로로 제시했다. 윤석열 역시 정치의 언어를 법률과 수사의 언어로 환원하면서,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 처벌의 문제로 바꾸었다. 이때 정치는 더 이상 공존의 기술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전쟁이 된다. 이런 정치가 반복될수록 시민은 더욱 피로해진다. 정치가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삶을 더 소모시키는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로가 누적될수록 시민은 다시 강한 지도자를 원한다. 이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고리를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 개혁 이전에 시민의 자기 인식 변화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에게 묻는다.


“너는 자유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너는 불확실한 선택의 결과를 떠안을 용기가 있는가?”

“너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에도 복종할 수 있는가?”


그런데 참주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제거한다. 그는 자유를 단순화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며, 결과의 책임을 혼자 떠안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그 약속은 거짓이다. 참주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음모, 적대 세력, 내부의 배신자. 그렇게 참주는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 분열을 자신의 정당성으로 삼는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깊은 역설이 드러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피로다.


그래서 그래서 민주 시민은 트럼프와 윤석열을 비난하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판이 구조와 시민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분노 해소에 불과하다. 참주는 제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참주를 낳는 조건은 그대로 남는다. 민주주의를 구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언제나 민주주의를 덜 신성화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그러나 그 위험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 때만,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체제보다 덜 파괴적이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 가지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


첫째로 선한 지도자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시민의 본성적 성숙에 대한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

셋째로 정치가 우리를 대신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불편한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실수하고, 권력은 남용되며, 시민은 언제든 피로해진다. 헌법주의와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은 이 냉혹한 전제를 제도 속에 새겨 넣은 결과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되풀이하여 참주를 선택하는가?”


그 이유는 참주가 강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지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피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선거도, 어떤 헌법 개정도, 어떤 정권 교체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우리의 관성적인 태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이상 구원자를 찾지 말고 그 대신에 제도를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제도의 개선을 위한 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정치적 욕망을 성찰하고 윤리적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 이르러야 비로소 민주주의는 참주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트럼프와 윤석열이라는 우리 시대의 참주적 현상은 우연도, 개인의 일탈도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정치의 병리, 다시 말해 민주정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의 최신 사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도덕적 규탄을 넘어서는 사유의 깊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의 역사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전은 과거가 아니라, 반복되는 현재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정치신학자들, 근대 헌법주의의 사상가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권력은 왜 타락하는가?”

“자유는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가?”

“인민은 왜 자기 자신을 억압할 자를 선택하는가?”


이 질문들은 결코 낡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더 절실해졌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의 일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 민주주의가 감정, 공포, 분노에 포획될 때 어떤 형태의 권력이 출현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였다. 윤석열 정권 역시 제도적 민주주의의 외형을 유지한 채, 실질적으로는 법치와 권력 분립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민주시민의 저항으로 몰락했다. 이때 고전은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현재를 해석하는 언어가 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민주정이 타락하여 참주정으로 전환되는 서술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는 민주정의 붕괴를 군사 쿠데타나 외적 침략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정 내부에서, 자유의 과잉과 욕망의 무절제가 낳는 필연적 결과로 설명했다. 고전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되는 패턴을 해부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해부의 언어를 다시 호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민주정을 포기할 수 없는가? 누구나 아마도 한 번쯤 이런 질문 앞에 멈춰 섰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취약한 체제라면, 이렇게 쉽게 참주를 낳는 구조라면, 민주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유지해야 하는가? 차라리 강한 질서, 명확한 권위, 결정력 있는 통치가 더 낫지 않은가. 이 질문은 비겁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비겁하다. 우리는 이미 보았다. 법치를 말하던 권력이 법 위에 서는 장면을, 공정을 외치던 정권이 선택적 정의로 사회를 갈라놓는 모습을,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권력이 민주주의 자체를 귀찮아하는 얼굴을. 그래서 민주정은 피곤해 보인다. 느리고, 시끄럽고, 늘 싸운다. 성과는 불확실하고 책임은 분산된다. 반면 참주는 단순하다. 명령은 빠르고 말은 명확하며 적은 분명하다. 불안을 혐오로 바꾸고 분노를 충성으로 바꾸는 데 능숙하다.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정을 포기할 수 없다.


민주정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것이 도덕적 체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민주정은 인간이 선하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현명하다고도, 이성적이라고도, 책임감 있다고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쉽게 속고, 쉽게 분노하며, 쉽게 권력에 매혹된다. 민주정은 이 불편한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견제가 필요하고, 지연이 필요하며, 불신이 제도화된다. 참주정은 정반대다. 참주정은 한 사람의 선의, 한 지도자의 결단, 한 집단의 순수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좋은 사람’을 찾아왔다. 검사 출신이니까, 군인 출신이니까, 말을 세게 하니까, 우리 편의 적을 미워하니까. 그러나 정치는 인물의 도덕성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는 구조로 인간을 통제하는 기술이다. 민주정은 그 사실을 가장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체제다.

민주정은 실패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가치가 있다. 참주정에서 실패는 반역이 된다. 질문은 배신이 되고 비판은 적대가 된다. 그래서 실패는 은폐되고 왜곡되며 반복된다. 반면 민주정은 실패를 공개한다. 무능한 정치, 추한 토론, 실망스러운 선택들이 기록으로 남는다. 고통스럽지만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는다. 이 책에서 살펴본 모든 참주들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들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곧 질서였고 자신이 곧 국가였기 때문이다. 민주정은 지도자를 교체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고, 기록할 수 있으며, 질문할 수 있다. 그 가능성 자체가 민주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민주정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망스럽고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가 구원을 약속하는 순간, 그 정치는 이미 폭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이 세상에는 완전한 정의가 없으며, 플라톤이 두려워했듯 자유는 언제나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했듯 어느 한쪽의 승리는 곧 타락의 시작이다. 민주정은 이 모든 비관을 끌어안은 채 출발한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늘 미완성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딱 한 가지만은 약속한다. 아무도 신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급진적인 약속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열광해서는 안 된다. 정치에 흥분해서도, 지도자에게 감동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는 열광이 아니라 피로를 견디는 체력 위에서만 살아남는다. 지루한 회의, 반복되는 논쟁, 끝나지 않는 제도 개혁을 견뎌내는 능력 말이다. 참주는 늘 말한다. 이제 그만하자고. 민주정은 묻는다. 그래도 계속할 수 있겠느냐고?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회만이 적어도 다음 참주의 등장을 최대한 늦출 수 있다.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정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민주정의 추함과 취약함을 가능한 한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렇게 취약하기에 우리는 민주정을 포기할 수 없다. 민주정은 최선의 체제가 아니다. 다만 최악을 상시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다. 그리고 그것이면, 지금으로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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