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루는 이유
지금 내 아내는 꽃을 피운다. 물론 아내는 결혼 후 보통의 새댁들처럼 주로 웅장하고 화려한 관엽식물로 집을 장식하였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다가 나의 어머니이자 아내의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해인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베란다에 야생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였다. 동물에 몰두한 것이 4년 전부터이니 그보다는 1년 늦었다. 그런 결과 이제 아내는 토끼와 야생화에 푹 빠져있다. 그런 아내를 나는 그저 지켜만 보다가 무거운 화분을 나를 때나 거름을 옮길 때 조금 거들뿐이다. 그러면서 문득 아내를 바라보게 된다. 아내는 더운 날이면 온도가 38도까지 오르는 베란다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푸른 생명체와 동조(同調)를 이룬다. 무엇이 아내를 이토록 식물에 빠지게 했을까? 아내에게 물어보니 사실 자기는 결혼 전부터 벤자민과 같은 커다란 나무가 주는 강함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일종의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를 함께 기르면서 서서히 작고 여린 것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단다. 사실 야생화는 화려한 맛은 없다. 그러나 찬란하지만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인공적으로 생산해낸 꽃들에 비해 말 그대로 야생에서 저절로, 그냥 자연스럽게 피는 꽃이 주는 소박한 감동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단다. 그래서 이제 중독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아내가 내게 사무실에 가져다 두라고 관목 화분 하나를 선물했다. 나무의 이름은 크로톤이다. 크로톤은 그리스어 코로토스(κρότος)에서 온 명칭으로 진드기라는 뜻을 가졌다. 일부 크로톤의 씨앗 모양이 진드기처럼 생겨서이다.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의사이며 식물학자인 아코스타(Cristóbal Acosta, 1525-1994)가 1587년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식물이다. 한때 크로톤의 씨앗에서 추출된 기름이 본초학 재료로써 하제(下劑)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요즘은 그 독성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도 전통 의학에서는 크로톤을 변비나 상처 치료에 사용해왔다. 또한 아마존 원주민들은 크로톤에서 나오는 붉은 유액을 일종의 반창고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재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약 150여 개의 크로톤 종이 발견되고 있다.
아내가 내게 선물한 크로톤은 Codiaeum variegatum이라는 학명을 지닌 것으로 흔히 크로톤 ‘마마’로 불리는 것이다. 높이 1.8m 폭 1.5m까지 자란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분갈이가 필요하다. 또한 화려한 색깔을 유지하려면 비교적 밝은 빛과 넉넉한 물이 필요한 식물이다. 그래서 창가에 두고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기온은 16-27도를 유지해주어야 한다. 5도 이하로 내려가면 잎사귀가 급격히 시들 수 있다.
크로톤은 일단 햇빛이 많아야 하므로 사무실이나 서재 창가, 또는 베란다에 놓는 것이 좋다. 아내의 설명으로는 음양오행적으로 붉은색은 화기를 의미하니 사주에 불이 필요한 사람이 가까이 두면 개운에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주 해석이 단순해서는 안 된단다. 자신의 사주 원국에서 화가 부족하다고 해서 무조건 화기만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화기에 힘을 보태줄 목과 또 그 기운을 잘 이끌어 줄 토(土)도 필요한 법이다. 오행의 조화가 이루어져 기운이 막힘이 없이 순환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일간이 목이고 화가 부족하니 그럴 만도 하다.
아내는 율마도 맘에 들어 하지만 요즘 일일초를 개량하여 꽃잎이 단아한 페어리 스타(Fairy Star)를 특히 귀여워한다. 이 나무는 보통 화이트, 핑크, 다크 핑크, 레드의 4가지 색으로 핀다. 내 아내가 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러 해를 살아 목질화 되면 마치 무궁화처럼 봄 여름 동안 지속적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뿌리가 눈부신 건강한 흰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식물의 뿌리를 보고 건강을 확인하는 능력을 키웠다. 그래서 분갈이할 때마다 뿌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러나 사실 아내는 페어리 스타 이외의 모든 식물을 두루 사랑한다. 그래서 딱히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제대로 답을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물에서 일종의 의식(意識)을 느낀단다. 식물이 기뻐할 때와 울적할 때를 느낀다는 것이다. 식물과의 철저한 공감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우울할 때에는 식물과 동물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위로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식물에도 고귀한 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니 그들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는 범신론이나 애니미즘을 추종하지도 않고 급진적 생태론자처럼 인간과 동물의 근원적 차이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식물을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위안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배격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Immanuel Kant(1724-1804)의 주장을 실천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실 인류문화사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인간중심주의적 태도가 강조되어 왔다. 특히 신의 선택받은 피조물로서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권리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신은 아담을 창조한 다음 그에게 들짐승과 새를 창조한 다음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도록 하였다.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으로 시작된 것이니 그들의 습속으로 분석해 보면 이는 지배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이름인 야훼(יהוה)를 철자대로 읽지 않고 나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אֲדֹנָי)로 부른 것이다. 인간이 신을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 대신 자연은 철저히 인간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일신론자로 인간의 우주에서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는 내가 그런 아내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런 태도를 지닌 아내에게서 또 한 수 배운다. 21세기는 누구나 인정하듯이 유일신론보다는 생태론이 인류의 미래를 더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속 가능한 생존의 모색에서 지배보다는 공존이 더 나은 패러다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