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것은 윤석열의 깊은 상처다.
윤석열이 이명박과 박근혜를 치고 문재인 정부와도 척을 두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사람이 그가 정의의 사도인 것으로 여겼다.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충성한다.’는 말을 할 때 만해도 윤석열이 탈권위주의적인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자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청와대 이전 사달을 둘러싼 행태를 보고 이제 그의 본심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권위를 증오하는 그가 전형적인 고집불통의 권위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트럼프의 모습이 보이는 이유이다.
윤석열의 최근 행태를 보면 그가 이해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freedom이 아니라 liberty라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허리띠로 구타당하던 압제의 시절에서 벗어나 (곧 liberty from the domestic violence) 자기 맘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곧 liberty to do anything he wants) 때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람의 전형처럼 보인다. 통상적으로 아버지라는 superego의 억압에 시달리던 나의 ego는 외상 후 증후군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그 증상이 심각해지면 자해 단계에 이른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 sadistic disorder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경우 이 자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받은 고통에 대한 대리 복수를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자기를 취직시켜준 상사에게 덤빈다든지, 술집에 가서 억지로 술을 권하는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심지어 취기를 핑계로 자기 구두에 양말을 담근 술도 마시라고 강요하는 가학적 기행의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자신이 아버지와 다름없는 권력을 지녔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상사를 치받거나 주사를 핑계로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폭력을 가한 아버지에게는 덤비지 못한다. 늙고 힘없는 아버지에게 덤빌 수 있는 충분한 힘과 권력을 쥐었지만 유교 문화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유교문화에서 불효는 무조건 패륜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가 상실되기에 이런 짓은 정말 미치고 나서야 하게 된다.
반면에 서양의 신화와 문화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치고 나가서 결국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정신분석학에서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특히 성장과정에서 절대 권력자인 아버지와 맺은 관계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평생 지배하게 되어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는 반드시 ‘복수’를 결심하게 되어 있다. 이를 서양의 신화와 문화에서는 아버지와의 직접 대결로 표현된다. 제우스도 아버지를 살해하여 자신만의 왕국, 아니 신국을 건설하지 않았는가?
이런 상처받은 정신을 지닌 자가 권력을 잡으면 주변 사람들이 매우 피곤해진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끊임없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인간은 절대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개인적 복수심을 감추기 위하여 반드시 조직을 활용한다. 개인적 복수도 조직을 도구로 삼아 수행할 때에 죄의식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에 철저히 충성하기 마련이다.
대다수의 국민만이 아니라 천하의 조중동조차 문제 삼는 청와대 이전을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윤석열에 대한 분노가 들끓지만, 한 편으로는 그가 매우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형적인 아버지 사랑의 부재에 따른 외상 후 증후군을 앓는 우울한 짐승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윤핵관의 조언조차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밀어붙이는 그의 모습에서 권위나 힘보다는 상처받은 짐승의 울분이 파동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윤석열이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운영을 5년 동안 위임받은 자라는 사실에 있다. 개인적 상처를 지닌 자가 그 울분을 국정 운영에 반영하게 될 때 어떤 사달이 나는 지를 트럼프가 잘 보여주었다. 트럼프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매우 껄끄러운 자다. 능력이 뛰어난 형에 밀려 늘 찬밥이었다. 그러한 아버지 사랑의 부재로 시달리던 그는 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결국 여러 여자들과 성적 추문을 일으키고 대중매체에서 저질스러운 기행으로 인기를 얻는 행태를 보였다. 그런데 그런 트럼프가 느닷없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가 막힌 일이 발생했다. 사실 그의 당선은 미국의 비이성성의 반영이다. 곧 그를 지지한 자들의 주류가 백인 노동자 계층이 주로 차지하는 분노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바이든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지만 현재 미국에서 여전히 차기 대서 후보로 강력히 부상하고 있다. 미국에 여전히 분노한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반증이다.
윤석열의 당선을 이끈 한국의 유권자들 대부분도 분노한 자들이었다. 그를 지지한 유권자의 40%는 문재인 정권을 증오하는 이들이었고 30%는 민주당을 혐오하는 이들이었다. 결국 그에게 표를 준 이들 가운데 70%가 분노심에서 투표를 한 것이다. 이성이 상실된 투표였다. 현재 대한민국의 하늘 위에는 이러한 비이성성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1848년 유럽의 하늘을 공산주의의 유령이 떠돌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윤석열은 정권이 교체되기도 전에 대한민국 사회에 비이성성과 분노의 씨앗을 더욱 퍼뜨리고 있다. 그를 반대하는 국민의 분노에 더욱 부채질할 뿐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날을 세우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적 대화를 통한 사회 통합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았다. 정권 이양 이전에 벌써 나라를 정확히 둘로 갈라놓고 서로 증오와 분노로 대립하게 만드는 자가 어찌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국방부 이전에 500억 원이 드는지 1억 원이 드는지, 청와대의 풍수나 좋은지 나쁜지는 전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이를 두고 여야가 말싸움 중인 것이 더욱 한심하다. 문제는 윤석열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토론과 의견 수렴, 그리고 합리적 절차를 통한 의사결정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제 군주적으로 자의적인 권력을 멋대로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그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여론보다는 공간에 지배당한다는 정신을 지닌 자신의 이른바 ‘철학과 신념’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비록 5년이지만 나라를 맡긴다는 것에서 심각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감히 5년짜리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이리도 오만방자하게 국민을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근원이 아버지의 사랑의 부재라면 무엇보다도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사랑을 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윤석열에게 헨리 나우웬의 <상처받은 치유자>를 읽어볼 것을 권해본다. 그의 정신 건강에 이 나라의 향후 5년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일을 청와대 이전보다 앞세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김건희와 함께 읽으면 더욱 치료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제발 소중한 대한민국의 국민을 어렵게 여기기 바란다. 정권은 5년 만에 바뀌지만 이 나라와 그 민족은 5000년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국민의 뜻을 무시한 자에게 남은 것은 촛불과 탄핵 말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