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10대 명문 대학도시 시리즈
파사우는 바이에른 지방의 동쪽 끝에 있어 도나우강과 인강을 사이에 두고 오스트리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도시이다. 사실 파사우는 도나우(Donau)강과 인강(Inn)과 더불어 일츠강(Ilz)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도시이다. 주민은 52,000명 정도인데 대학생이 12,000명이고 교직원이 1,100명이니 문자 그대로 대학도시이다. 사실 파사우대학교는 1978년에 개교한 신생 대학교이다. 물론 이 대학교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는 1622년에 개교한 가톨릭 성직자교육을 위한 김나지움(Gymnasium)이 있다. 이 김나지움이 1923년에 철학-신학전문학교(philosophisch-theologische Hochschule)로 개편되었다가 1978년 파사우대학교 가톨릭신학부포 편입되면서 오늘날의 파사우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이후 파사우대학교는 법학부, 경제학부, 철학부, 정보-수학부 등 4개 학부를 지닌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학생 수가 12000명에 불과하여 비교적 작은 종합대학교에 속한다. 이렇게 작은데도 독일 10대 대학교에 당당히 선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제화에 있다. 그리고 원래 이 대학교의 기초 학부였던 가톨릭신학부는 바이에른정부와 바티칸의 협정을 통하여 15년 동안 ‘활동 정지’ 상태에 있게 되었다. 학교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다시 가톨릭신학부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철학부에서도 순수 철학만이 아니라 고고학도 공부하도록 교육 내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파사우대학교는 독일의 다른 대학교와 달리 시내 중심가에 자체적인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캠퍼스는 2009년에 독일 대학잡지인 UNICUM이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로 선정할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다. 현재 잠정적으로 ‘활동 중지’된 가톨릭신학부의 건물은 원래 1070년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이 캠퍼스 밖에 있다. 최근에 지어진 캠퍼스의 건물들은 당연히 최신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 가운데 IT센터(IT-Zentrum)가 유명하다. 기숙사와 식당도 수준급으로 마련되었고 신생 대학교답지 않게 도서관 장서도 200만권이나 보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파사우대학교는 170여개의 외국 대학교와 자매결연 하여 국제적 대학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학생의 37% 정도가 그 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가고 있을 정도이다. 파사우대학교는 새로 시작하는 대학교가 어떻게 명문대학교가 되는 지를 몸소 보여주는 매우 탁월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몸집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과 주정부의 과감한 투자로 단숨에 정상권에 오른 파사우대학교는 독일만이 아니라 외국의 대학교에도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파사우 시정부가 당당하게 이 도시가 대학도시라고 자랑할 만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파사우는 세 강의 합류하는 지역에 세워진 도시답게 독일에서는 ‘삼강도시’(Dreiflüssestadt)로 불린다. 이 지역의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파사우는 오래 전에 켈트족이 살던 곳이다. 현재 파사우 대성당이 서있는 자리에는 원래 로마제국이 세운 바타바 요새(Castra Batava)가 있었다. 바타바라는 이름은 로마제국의 용병으로 싸운 바타바 민족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 이름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오늘날의 파사우(Passau)로 변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중세 초기인 739년에 이미 파사우에는 가톨릭 주교좌가 들어설 만큼 기독교가 빨리 전파된 곳이기도 하다. 이때에 니더른부르크 수도원(Kloster Niedernburg)이 세워졌다. 그래서 이 지역은 수도원이 관할하였다. 그러나 999년 하인리히 2세 황제가 파사우에 주교를 임명하자 수도원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단철업(Schmiedehandwerk)이 이 지역에서 발달하면서 파사우는 주교관구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주교는 과거 수도회가 사용하던 니더른부르크 수도원 건물을 주교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교의 착취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제압되는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어 닥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지독한 가톨릭 도시였던 파사우도 결국 1552년 파사우조약을 맺고 루터교도 종교 활동을 하도록 합의하였다. 변화의 바람을 막기에는 파사우가 너무 작았다. 파사우의 개신교와 관련되어 매우 유명한 것이 아우스분트(Ausbund)로 불리는 성가집이다. 아우스분트는 독일어로 표준, 모범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직도 미국의 아미시파(Amish)가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미시파는 17세기 유럽에서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재세례파 개신교 교파로 독특한 폐쇄주의와 금욕주의로 유명하다.
파사우가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지역답게 홍수도 잦았고 큰 불도 잦았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이 오히려 파사우가 변화에 빨리 적응하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니 말이다. 1918년 11월 혁명의 바람도 이곳에 몰아닥쳤다.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으니 이도 당연할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중부 유럽의 독일 점령지역에 살던 독일 난민들이 파사우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1945년만해도 이 도시에 28,000명의 독일 난민들이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수용할 임시 숙소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1952년 이곳에서 독일 최초로 유럽주일축제(Festspiele Europäische Wochen)라는 문화축제가 열렸다.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잔치였다. 그러나 파사우는 이후에도 주기적인 홍수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한 자연의 변화에 겸손한 때문일까? 1980년 파사우는 유럽통합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도시에 수여하는 유럽상(Europapreis)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1989년 동독이 무너지자 수천 명의 동독주민들이 헝가리를 거쳐 파사우에 몰려들었다. 파사우시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 막사를 건설하였다. 이미 이런 경험이 풍부한 도시였다. 변화와 홍수는 파사우시가 2004년 대대적인 신도심(Neue Mitte) 건설에 나서게 만들었다. 이 사업으로 파사우는 매우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도 홍수를 막지는 못했다. 2013년의 홍수는 대학교의 운영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파사우대학교에서 공부할 생각이 있는 사람은 홍수와 친해지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파사우대학교 학생들은 이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페이스북에서 ‘파사우 청소 캠페인’(Passau räumt auf)을 벌여 이 해의 독일시민상(Deutschen Bürgerpreis)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도시의 모습을 대학생들이 늘 활기찬 젊음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2015년에는 난민들이 파사우에 10만 명 가까이 몰려들어 커다란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접경지역의 도시가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그러나 이 또한 파사우는 잘 극복하였다. 이렇게 파사우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도시이다. 그러나 그런 분잡함 가운데에서도 파사우대학교는 최고의 대학교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독일 여느 도시에나 있는 구도심(Altstadt)은 인강과 도나우강 사이에 있는 좁은 땅에 있다. 여기에 있는 유명한 건물로는 1668년에 건축된 성스테판대성전(Dom St. Stephan)이다. 이 주변에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좁은 골목들이 어이진다. 그런데 이 도심을 건설한 이탈리아 건축가가 이탈리아풍으로 구성하였기에 흔히 파사우가 바이에른의 베니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홍수가 나는 것도 닮아 더욱 그런 것으로 보인다. 구도심에서 도나우강을 건너면 베스테 오버하우스(Veste Oberhaus)로 불리는 1219년에 지어진 요새가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높이에 맞게 베스테 니더하우스(Veste Niederhaus)라는 작은 건물이 마리아힐프(Mariahilf, ‘성모의 도우심’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순례 성당과 함께 강가에 서있다. 구도심 서쪽으로 중앙역과 성니콜라수도원(St.-Nikola-Kloster) 사이의 지역은 위에서 말한 도시 재개발의 산물이다. 이 재개발은 구 철도기지창과 독일연방군 기지가 철수하여 대규모의 신축 용지를 확보하여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독일 여느 도시처럼 시내에 가보면 중세의 향기를 듬뿍 맡아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신구의 조화가 파사우만큼 적절히 이루어진 도시도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