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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an 25. 2024

공지영이 조국을 버리고 이준석을 택한 이유는?

'합리적 무지'에 빠진 좌파의 전향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공지영이 한 때 조국을 지지했던 자신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준석이 귀여워 보인다고 고백했다. 음... 이게 뭔 소리지? 공지영이 조국을 좋아했다는 말도 금시초문이지만 이준석을 간택했다? 이 무슨 봉창 뜯는 소린가 해서 기사를 정독해 보았다. 먼저 <아이뉴스24>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출처: https://v.daum.net/v/20240123184120046?f=p)      


“공지영 "조국에 실망했다"…하태경 "진심으로 응원한다" - 소설가 공지영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며 조 전 장관을 응원했던 과거를 후회한다고 밝혔다.”     


마음이 간 사람에게 실망하는 법이다. 무관심한 대상에 대해 실망하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음에 담은 사람에게 실망하면 대부분 공지영처럼 말한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잘못은 대부분 생각을 잘못한 사람에게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이 내 맘을 아프게 한 대상을 원망하고 잘못을 전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공지영이 이런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조국의 뭐가 맘에 들었는데 인제 와서 뭐가 실망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기자회견도 아니고 자기의 책에 썼단다. 기사에 인용한 공지영의 말을 다 인용해 본다.   

  

“공 작가는 3년 만에 신간을 출간한 책에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열렬하게 옹호했던 한 사람이 내가 이전까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공 작가는 2019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조국 전 장관을 그렇게 털어 입증된 비리가 나왔다면 검찰 개혁은 힘들었을 것"이라며 지지를 표시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신작 에세이에서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다"며 "욕을 먹으면서도 그를 감쌌던 건 당시로선 나름의 애국이고 희생이었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었구나 싶었다"고 털어놨다. 공 작가는 "나중에 과오가 드러났을 때 그가 '미안하다', '잘못했다' 한마디만 했어도 이렇게 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공 작가는 "그렇다고 보수로 간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 세대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지지하지 않고 비판적 자세를 취하며 사안별로 판단하겠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구나... 공지영의 마음이 꽤 아팠나 보다. 공지영이 알던 조국이 그 조국이 아니었다니. 원래 사랑하다가 배신당하면 누구나 마음에 쓰라린 상처 하나쯤 가지기 마련 아닌가?   


게다가 공지영이 과거 조국을 놓고 진중권과 대립하고 친구 관계도 끊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단다. 그러자 진중권이 ‘예전의 공지영’으로 돌아와 기쁘다고 화답까지 했단다.(링크: https://v.daum.net/v/20240125075814241) 관련 기사를 인용해 본다.   

  

“소설가 공지영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무턱대고 옹호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 일로 친구 관계까지 끊었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진 전 교수는 '내가 알던 공지영으로 돌아온 것만으로 반갑다'며 공 작가를 향해 두 팔을 펼쳐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공지영이 조국의 어느 면을 보고 열렬하게 옹호했다가 뭘 보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하게까지 되었나? 그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위에 인용한 신문 기사에 어림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추가로 인용해 본다.     


““당시 상황에 대해 공 작가는 "나중에 과오가 드러났을 때 그가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과 진 교수에게는 "미안해 죽겠다"고 했다. 이어 "그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다"며 "욕을 먹으면서도 그를 감쌌던 건 당시로선 나름의 애국이고 희생이었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었구나 싶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공 작가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본인들만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지금의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며 "80년대식 구호를 외치는 이데올로기적 동지들과 결별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라는 말로 무조건 86세대를 옹호하던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알렸다.””     


이제 공지영은 과거 많은 좌파 인사가 전향하여 아예 우파가 되는 전례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우파가 된 것은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있지만 한국과 같이 첨예하게 이데올로기가 대립한 나라에서 좌파 아니면 우파밖에 더 있겠나? 물론 김지하처럼 드러내놓고 좌파를 욕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애석해할 것은 없다, 여자의 마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갈대와 같지 않은가? 변하는 것이 인간적이다. 사랑은 변하는 법 아닌가?

  

인간이 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다. 나에게 도움이 되기에 남을 좋아한다. 내게 해가 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나를 때리고 욕하고 돈을 뜯어 가는 데도 좋아한다면 한 마디로 미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바로 신흥 종교의 광신도다. 그들은 마조히즘 신드롬을 겪어서 수난을 당할수록 더 큰 쾌감을 느낀다. 마치 그런 고통이 타인을 위한 헌신적 사랑의 실천을 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 가능성까지 엿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신흥 종교 신자가 이 경지에 이르지는 않는다. 상당수는 그 조직 안에서 한 자리, 한탕하려고 노리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매우 많은 광신도가 마조히즘 신드롬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마조히즘 신드롬이 연예계나 정치계에서는 팬덤 문화로 드러난다. 이른바 광팬이 되면 알아서 ‘조공’을 바치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심지어 요즘은 애완동물을 대상으로 그런 마조히즘 신드롬을 보이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인간의 아픔에는 무감각한데 개나 고양이가 조금만 아파도 마음의 경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 학대 관련 영상이나 소식을 들으면 광분하게 된다. 이는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다. 일종의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이 되어 마치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정신이 그런 집단의식에 동조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마조히즘 신드롬 가운데 유독 정치적 팬덤 문화가 한국에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이런 마조히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미국인들 대다수는 빈민이다. 트럼프는 그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빈민과 섞인 적이 없는 삶을 평생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그런 빈민의 분노를 이용하여 더 많은 권세를 누리고자 하고 실제로 올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거의 확실하다. 미국의 많은 정치 분석가는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트럼프는 현대판 귀족인데 백성이 스스로 그 귀족을 숭배하는 전근대적인 현상이 민주주의의 첨병을 자부하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트럼프는 분명히 쿠데타에 가까운, 헌법 정신을 위배하는 행위를 했고 현재 재판도 받고 있다. 이른바 잠재적 범죄자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많은 국민은 그를 다음 대통령으로 원하고 있다. 그가 지난번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의 통치 스타일은 독재자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독재자를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국민이 원하는 것이다.     


이런 ‘기현상’에 대해 미국의 몇몇 전문가가 진단을 내렸다. 관련 기사를 인용해 본다.(링크:https://news.berkeley.edu/2020/12/07/despite-drift-toward-authoritarianism-trump-voters-stay-loyal-why)   

  

“Many people follow a political party as they would a football team, researchers say. Values may be less important in shaping allegiance than family tradition or the shared identity and social pressures of a community. Most low-engagement voters simply follow the cues of their preferred party leaders. If a popular leader fans division, they polarize. If the leader appeals to emotions such as sadness or anger, their passions are aroused.”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팀이나 야구팀을 좋아하듯이 정당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당에 충성하는 데는 가족의 전통이나 공유된 정체성, 공동체의 사회적 압력이 공부를 통해 배운 윤리적 가치보다 더 중요한 작용을 한다. 특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유권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정당의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기 있는 정치가가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면 금방 그가 시키는 대로 한다. 특히 그 정치 지도자가 감성에 호소하면 지지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미국의 학자들이 rational ignorance, 곧 ‘합리적 무지’라고 부른다.    

 

합리적인 무지라는 어떤 진실을 아는 데 드는 수고와 노력이 그것을 알고 나서 얻게 되는 이득에 비해 너무 크다고 여기면 알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성향을 말한다. 한국말로 한다면 그것을 안다고 해서 밥이 나와 쌀이 나와라는 태도를 지칭한다. 그리고 총선과 같은 때 투표를 안 하는 사람의 태도도 지칭하는 개념이다. 곧 투표장에 가서 그 복잡한 투표 절차를 거쳐 한 표를 행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 데 뭐 하러 그 고생을 하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합리적 무지’다. 내 한 표가 정치에 얼마나 중요한 변화를 주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열심히 정치, 더 나아가 철학과 윤리, 법을 공부하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무지를 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합리적인 무지를 선택한 상태에서 내가 평소 지지하는 정당의 지도자가 갈라 치기 하는 짓을 하면 그를 광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잘 모르지만, 그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정당을 지지하고 말겠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이렇게 해서 팬덤이 형성된다. 이는 정치가만이 아니라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의 ‘본질’을 연구 분석하는 노력이 귀찮다. 그저 그 대상이 보여주는 겉모습에만 취해서 ‘합리적 무지’의 상태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오는 도파민에 취해서 쾌감을 즐기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호르몬의 작용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면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공’이 시작되고 이른바 ‘묻지 마!’ 지지 세력이 되어 광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합리적 무지에서 축구팀, 야구팀만이 아니라 정당이나 정치인 연예인의 광팬이었던 사람이 ‘진실’을 알고 나면 공지영처럼 분노하고 노선을 갈아타게 된다. 갈아타는 정도가 지나치면 증오하게 된다. 사실 그렇게 ‘진실’을 몰랐던 것은 자기 탓인데 이런 부류의 사람은 대부분 남 탓을 하기 마련이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무지했다는 근원적인 잘못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제 공지영이 조국에 대한 실망이 분노로 바뀌는 단계로 나갈 것이다. 그런 변하는 공지영의 모습을 지켜보자. 공지영의 ‘합리적 무지’가 깨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또 한 사람의 지식인이 좌에서 우로 전향하고 그곳에서 또 다른 차원의 ‘합리적 무지’에 시달리는 모습 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 ‘본질’을 배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 정치가의 의무와 책임, 유권자의 의무와 책임과 같은 정치학, 철학, 심리학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차라리 ‘합리적 무지’를 택한다. 그 많은 것을 언제 공부하냐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 배운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냐 말이다. 내가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생각이 귀차니즘을 낳고 귀차니즘에 종속되고 나서 그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무지’가 나의 삶을 점점 더 힘들게 한다는 진실을 모르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정당과 지도자가 싫어하는 정당과 정치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며 사는 ‘합리적 무지’를 택한 유권자 자신이 바로 이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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