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찌들고 늘 그래 왔던 루틴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기가 대상화되는 경험을 통해 낯선 자신을 보게 된다. 자기가 대상화되는 경험은 자신의 삶을 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 발생한다. 낯선 시각은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자신의 삶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할 때 자신을 대상화하게 된다.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할수록 자신의 대상화는 큰 파급을 몰고 온다. 새로운 시각으로 객관화된 자신의 모습에 뼈저린 고통을 느낄 때, 결코 막을 수 없는 삶의 특이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특이점의 발생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힌 삶을 모든 가능성으로 개방시키는 충격적 사건이다. 특이점의 충격에 전도(顚倒)된 인간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환멸 하며 삶을 총체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각성이라는 칼을 꺼내 든다. 각성의 칼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살해하고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위해 필요치 않은 것들을 쳐낸다. 또한 자기 자신으로 이르기 위해 각성의 칼을 치켜든 자에게는 반드시 그에 따른 실존적 질문이 주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를 잘 알 것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자신이 누구인지 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현대인의 정신과 육체는 주로 내면보다는 외부를 주시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세상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기와의 대면은 낯설고 미숙하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낯선 존재이다. 삶의 특이점에서 각성하려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왜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할까?
만약 낯선 곳에서 이전에는 가보지 못한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선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파악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야지만이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가늠할 수 있다. 하여, "나는 누구인가?"는 삶의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기 위해 현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분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숙고한다. 존재를 탐구하는 실존적 질문은 자신을 낱낱이 해부하는 것으로 그만큼의 고통이 따른다. 과거의 업식(業識)을 끊어내려는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면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는 것이다.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거나 자기에게 천착하지 않으면 자신은 어느새 사라지고 들뜬 마음으로 미래를 향한 청사진만 그리게 된다. 이러한 오해는 자기화되지 않은 압도적 사유를 별다른 치열함 없이 내재하여 언제든 구현해 낼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특이점을 일으킨 타자의 사유를 끌고 와 자신은 그 밑에 숨어버리고 뼈를 갂는 성찰 없이 손쉽게 각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자기와의 대면은 각성이라는 칼로 자신을 해체하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결국 각성을 향한 열망이 고통스러운 자기와의 대면을 추동하는 힘이다. 어설픈 각성은 삶의 어설픈 변화를 야기할 뿐이다.
자신을 해체하고 대면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자신과의 대면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있는 그대로라 함은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는 분별심에서 벗어난 자기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심을 일으키는 요소들의 해체가 선행돼야 한다. 우리에게 덧씌워진 특정한 가치, 이념, 관념, 통념, 표상의 장막을 걷어낼 때 분별심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편견과 색안경을 벗어내고 자신의 타고난 본성과 생명력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동안 뼛속까지 스며든 자신의 습(習)을 걷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불교에서는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방편을 교리로 삼고 있다.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위해 수행해야 하는 여덟 가지 덕목,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정견(正見)이 그 방편이다. 정견이란 대상을 차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는 분별지(分別智)를 넘어 사물의 본성,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견은 그것 자체로 수행과 정진 그리고 지적 두께라는 내공이 필수조건이다. 지성이 깊어질수록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통찰도 깊어진다.
심연에 빠진 존재를 구원하는 강도 높은 각성이 아닐 경우 대부분은 삶의 극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각성의 축복을 완전히 품을 수 없다. 자신과의 대면을 뭉뚱그린 채 손쉬운 각성을 치르는 경우가 있는 반면, 특이점을 일으킨 강력한 사유에 압도되어 각성은 없어지고 무기력한 자기반성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철저한 각성을 거치며 자신을 쇄신하기 위해선 자기 긍정이라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이 아닌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어 자신의 한계가 명확히 인식된 자기 긍정이다. 그래야만 자기 환상 또는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고 통렬한 각성의 과정을 온전히 마주하여, 특이점으로부터 촉발된 건너가기에 명확히 이를 수 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파악하며, 미래까지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을 찾아가며 앞서 열거한 과정들을 치열하게 겪어내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인가?"는 한 편의 일기로 남아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진실되고 간절하게 자신을 대면하고 싶다면 치열하게 성찰하고, 과감히 벗어던지고, 있는 척하지 않으며, 주눅 들지 않으며, 당당하며, 긍정하라. 그럴 때 비로소 장막에 갇혀있던 내가 누구인지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