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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쌤 Apr 29. 2019

이야기가 있는 주방 01. 엄마와 커피

막 설거지를 끝낸 엄마가 기름때가 앉은 타파웨어 통에서 장미 무늬가 그려진 도자기 손잡이 티스푼으로 커피, 프림, 설탕 순으로 듬뿍듬뿍 담아 커피를 탄다.

이가 빠져 보기 흉한 프랑스산 루미낙 잔에.


익숙하고 여유롭게 커피를 들고 개수대 앞에 깔아 놓은 작은 러그에 쭈그려 앉아 싱크대에 기대어 진득한 커피를 한 모금 넘긴다. 캬~소리를 내면서.


‘엄마, 예쁜 잔에 타서 마셔, 그리고 제발 식탁에 앉아서 마시면 안 돼?’
딸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나는 이 잔에 마셔야 제일 맛있더라. 그리고, 이 자리가 보일러 시작하는 자리라 따뜻해. 나는 이러고 마시는 게 제일 좋아!‘
엄마도 지지 않고 대답한다.


안성기 아저씨가 광고하는 맥심 커피는 우아하던데, 엄마가 마시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안 든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세상의 많은 딸들이 다짐한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대학을 가고, 사회생활을 하고, 한 번뿐인 인생 시크하게 살 줄 알았던 꿈 많은 딸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게 되니 그 잘난 인생도 엄마의 인생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가 마시던 믹스커피가 진저리 나게 싫어서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카페인이 절실해졌다.


오늘 설거지를 끝내고 주방을 윤이 나게 닦고, 커피 한 잔을 들고 개수대 앞에 깔아놓은 푹신한 러그에 앉았다.
(아파트 개수대 밑에는 보일러 분배기가 있어 난방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따끈한 바닥에 앉아 향이 근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피로가 조금 풀린다.


진주 목걸이를 하고 포근한 니트 카디건을 어깨에 걸치고 우아하게 폼나게 마시려고 비싼 커피잔도 샀다.

커피 광고처럼....
그런데 인생은 광고가 아니고 실전이더라.

그 예쁘고 좋은 잔에 이가 나가면 차마 버리질 못 하고 내가 마시게 되더라. 그렇게 되더라.

그 옛날에 엄마가 향유했던 잠깐의 시간을 이제는 내가 누린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듯하지만, 둥글게 순환한다.


*사진의 커피는 커피 머쉰으로 만든 ‘더블 샷 소이 라테’입니다.
30여 년 전 엄마들이나 현재를 살아가는 딸들이나 믹스커피냐 에스프레소냐의 차이지,
그녀들이 받는 위로는 언제나 진득한 커피에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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