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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Dec 17. 2023

풍경, 먼 데서 온





모든 풍경은 영혼의 상태이다.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바람소리에 눈을 뜬다. 의식이 내 몸에 알맞게 자리하기 전 외벽을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먼저 내게 깃든다. 다급하고 초조한, 성을 내다 제 풀에 지쳐 꺾여버린, 오래된 기침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누군가를 보듯 짧은 시간 내게 와닿은 바람소리는 종잡을 수 없는 바깥을 그리게 한다.



 눈을 떠 겨울모기에 물려 잔뜩 부푼 오른손을 본다. 봄바람 불던 날씨에 당혹스럽던 요 며칠, 콘크리트벽에 못질을 하다 잃어버린 못이 반대편 벽 몰딩 옆에 세로로 박혀있는 걸 발견하던 날 그 옆에 있던 작은 날붙이 하나를 무심히 넘겨버린 나의 오판 덕분에 오른손에 피어난 분홍 열꽃 5개를 훈장으로 얻게 되었다. 밤새 나도 모르게 긁은 탓에 부풀어 오른 크기가 상당하다. 당혹스럽다. 갑작스러운 한파와 계절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모기. 물러남을 잊은 종들의 흔적은 또 어떤 파동의 변수로 우리들에게 자리할까?


 창밖을 바라보니 설국이다. 지난밤 퇴근할 때 쏟아지는 눈의 양에 걱정이 되긴 했는데 이토록 많은 눈이 쌓였을 줄 상상도 못 했다. 타이어 공기압이 눈의 무게에 눌려 한숨을 토하다 전사했는지 저기압으로 내게 불퉁댄다. 굴려주면 공기입자들이 부딪혀 열을 좀 내볼까 싶어 개화공원으로 달려간다.


 이런 날씨를 아미엘은
"팽팽한 회색 하늘, 미묘한 색조의 차이가 군데군데 나타남. 지평선 산등성이에 걸린 안내. 우수에 젖은 자연.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의 눈물에 떨어진 젊은 날의 마지막 환상처럼 낙엽이 사방에 떨어져 있다... 전나무만이 이 폐병 천지에 홀로 위풍당당하고 의연하게 초록을 뽐낸다."라고 말했을 것만 같다.



 매일 일기를 쓸 때 처음을 날씨에 대한 서술로 시작했던 그의 기록들은 흥미롭다. 위트 있게, 때로는 지나친 수사에 거부감이 일기도 하지만 내 하루를 시작하는, 그리고 닫는 마지막이 이 날 내가 입었던 옷만큼이나 중요한 날씨에 대한 서술이 굉장히 흥미롭다.







 때아닌 폭설이라 생각하며 연도별 기후와 날씨를 검색해 보았다. 기후는 1년 간의 평균적인 대기 상태와 기온을 의미하지만 날씨란 나날의 기록이기에 얼마든지 변화는 있게 마련인데 날이 갈수록 지구 온난화부터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재앙에 가까운 일들에 의해 예측되지 못하는 날씨에 대한 보고는 이미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그레타 튠베리가 2019년 다보스 포럼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희망이나 낙관론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질겁하기를 바랍니다. 내게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이 공포를 여러분도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그녀를 기후환경 보전 운동의 최전방에 서게 만든 이유가 의무감, 도덕심 이런 것이 아닌 바로 공포라고 한다. "딜라이트 메어 Delightmare", 이상 기후의 달콤한 악몽이 악몽이 아닌 현실로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증거들이 보도되는 오늘, 눈더미를 헤치고 성주터널을 넘어 눈 속 잠든 마을에 숨어들었다.






 눈 속에 잠든 성주는 겨울밤 캐럴송을 부르는 작은 천사들이 깨워야 일어날 것만 같은 느른함이 있다. 이반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의 주인공 오볼로모프처럼 '길고 흐늘거리는 실내화'와 같은 잎이 없는 가지들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누군가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북서풍이 흔들어 깨워도 굳건하게 겨울눈을 감추고 선 나무들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잊혀 가는 도시이다. 옛 탄광촌의 영광은 석탄박물관의 기록 속에서만 반짝이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 옛길 또한 이제는 바쁘게 지워져 가는 도시지만 난 이곳이 좋다. 터널을 넘어 들어서는 순간 느릿해지는 속도와 시내와 다르게 확 바뀌는 산색이 늘 나를 부른다.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 고개를 넘어 도착한 개화공원에서 두툼하게 쌓인 눈담요에 같이 잠겨든다.


 한겨울 눈담요가 없으면 보릿고개에 큰 가뭄과 그로 인한 흉년, 빈번한 산불이 생긴다 했다. 연인 내리던 비와 이렇게 폭신 내린 눈 중에 동토에 도움이 되는 건 누구일까? 내린 눈으로 내 하루가 달라졌다. 소독과 운동으로 시작하던 아침에 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날씨로 변모한 설국을 마주하며 걷는 짧은 산책에서 나는 옷깃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냉침으로 정신을 맑게 걸러내는 중이다. 발끝까지 파고드는 냉기에 더 절실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중이다. 어떤 것에도 보호받지 않고, 기대지 않고, 걷고 또 기록한다.







 남극의 거대한 빙하가 녹아 북반구의 중간까지 해류가 밀려내려 와 만들어 낸 거대한 눈더미가 기후 재앙으로 보도되지만, 실상은 그런 모든 일들을 만들어 낸 우리 인류가 스스로 내야 할 인류세를 독촉하는 자연의 전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빙판으로 변해버린 길 위에서 우리들 동족만큼은 크게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추위 속에 영원히 잠드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간절하다. 언제고 자신들이 먼저일 수밖에 없는 이기심은 각각의 종들에게 모두 탑재된 종족보존의 제1 원칙이 아닐까?


 쓸데없이 생각이 길다. 한 움큼 집어든 눈을 삼킨다. 오래전 어린 날처럼 입가에 백설기 가루처럼 묻히며 파먹던 눈의 맛을 떠올리며 다시 입에 넣는다.  대기 오염을 걱정할 때는 지났다. 눈의 결정은 까마득한 하늘 위, 작은 재로부터 시작한다. 바닷속 생명의 부스러기처럼 하늘을 떠돌던 결정들이 모여 지구를 향한 고요한 항해를 결정한다.



 별빛보다 느리게, 운항을 마친 결정들을 손에 담뿍 떠본다. 이토록 서늘하고 가벼운 생의 무게라니. 계절의 옷을 바꿔 입은 전나무가 되어 가만히 눈 밭에 몸을 누인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드뷔시 달빛 : 드미트리 시쉬킨 연주

https://youtu.be/fhWgLrwOZZo?si=a9HYr8lhB3DkRI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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