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12살 즈음, 동생과 싸웠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호되게 혼나고 거기에다 언니답지 못했다며 더한 질책을 받고 난 뒤 전 다락으로 숨었다. 산으로 올라가거나 바다로 가기엔 날씨가 궂어 금방 비에 젖은 강아지꼴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기에 생존본능이 강한 난 점잖은 방황을 시도했다. 숨으려는 순간에 든 마음은 내가 이대로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치기, 그리고 정말 세상 어느 누구와도 단 한마디 말도 소통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열망이었다.
숨을 곳을 찾다 최후로 선택된 곳은 안방의 다락이었다. 늦은 밤이면 이 집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이 있다며 소리로 알려주던 우리 집에 있지만, 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두운 공간. 온갖 잡동사니들이 잠재적 폐기처분을 당하던 공간이던 다락문을 열자, 쾌쾌한 먼지냄새와 오래 묵은 공기들이 나를 덮쳤다. 먹빛의 커다란 공간이 나를 마주하는데 구석 쪽에선 빨간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과 어둠에 대한 공포가 팽팽하게 맞선다. 한참을 먹빛 어둠을 응시하던 중 먼저의 마음이 이겼던가 보다. 그곳으로의 잠입을 시도한 것이.
어둠 속에 오른쪽 발끝부터 집어넣었다. 하나씩 잠겨 들어가는 나의 일부가 신기했다. 흑과 백의 또렷한 경계 사이 내가 어둠을 삼키는 걸까, 어둠이 나를 덮는 걸까? 마침내 머리끝까지 다 잠겨 들었을 때 다락문을 닫았다. 아주 미세한 틈을 남겨둔 채로. 밖에서 스며드는 빛은 곧게 뻗어 사선의 틈을 만들었다. 빛을 통과한 먼지들이 부유하는 느릿한 시간의 숨결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던,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던 순간.
내 등 뒤의 어둠조차 사선의 빛을 더 빛나게 만드는 조명 같았던, 눈부시게 투명하고 아름답던 오후 4시의 빛.
잠이 들었던가보다. 온 식구들이 나를 찾아 동네 고샅길을 헤매는 동안 난 탐험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갯벌에서 대왕조개를 캐냈는데 그 안에 인어공주와 흑진주가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인어공주가 자기 몸보다 더 큰 흑진주를 내어주며
"이거 줄게. 나 좀 데려다줘. 저 깊은 바다로."
조개껍질채 그녀를 팔에 안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뻘의 밀도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심해져 바닷물을 코 앞에 둔 지점에선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다 생각이 들었던 난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까지야.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힘껏 헤엄쳐야 해. 물에 닿자마자. 다른 고기들 피해서."
그녀가 준 흑진주를 꺼내 내 입에 물고, 있는 힘을 다해 조개껍질과 함께 그녀를 바다를 향해 던졌다. 허공을 가른 조개껍질이 벌어지며 작디작은 아리엘*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수면 위를 날아다니던 갈매기들이 아리엘을 향해 쏜살같이 내려 꽂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마리, 가장 근접해 온 녀석의 부리 끝이 아리엘에게 닿으려 할 때, 파도 속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올라 갈매기를 후려쳤다. 지느러미에 맞고 수면 위로 내동댕이쳐진 녀석을 보는 사이 아리엘은 무사히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 없이.
온몸에 힘이 빠져버려 갯벌 위로 엎드려 버렸다. 나갈 생각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너무 지쳐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이대로 떠다니는 작은 물미역이 되고 싶다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엄마는 나 없어도 동생들과 알콩달콩 살아갈 테니까.
입에 물고 있던 진주의 짭조름한 촉감이 혀 끝에 감겨온다. 눈깔사탕, 10원에 1개짜리 커다란 눈깔사탕의 촉감. 이걸 삼키면 어쩌면 나도 바닷속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리엘이 주고 갔으니, 동화 속 이야기처럼 용궁으로 들어가는 마법주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고 삼킨다. 커다란 것이 목구멍에 들어오니 헛구역질이 밀려오며 숨이 막혔다. 그래도 다시 침을 삼키며 크게 목울대를 움직이니 뜨거운 불기운이 식도를 타고 아주 느리게 내 위를 향해 내려가는데 뱉을 수도, 더 빨리 삼킬 수도 없는 중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세게, 아주 세게.
"여깄어!"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함께 더위에 축 늘어져있던 나를 끄집어내는 아빠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지 꿈에서 깨어나 손을 폈을 때 손바닥엔 손톱자국이 붉은 초승달로 5개나 남아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보니 가슴 중앙엔 선명한 멍자국이. 조개껍질을 닮은 화인이 남아 있었다.
한 번씩 삶이 지루하고 어둡고 답답하단 생각이 들 때면 어린 날 다락에서 보았던 빛의 프리즘이 떠오른다. 마치 하나의 부채처럼 펼쳐져 부유하는 먼지들까지 빛나게 만들었던 사선의 작은 조각들. 그 안에선 어떤 것도 빛날 수 있겠단 생각이 들며 우리들 삶에도 저런 빛이 있다면 저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더랬다. 그리고 내가 삼킨 진주는 지금 내 몸속 어디를 떠돌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바닷물 속에 들어가야 확인이 될는지... (설마 요로결석 같은 걸로 뭉쳐있지는 않겠죠? 요즘 슬쩍 담낭이 아픈 것도 같은데... 음...)
존 윌리스엄스가 쓴 소설 <스토너>를 읽으면서도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공유서재 무소음"이란 곳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3개월, 6개월, 1년 등 다양한 정기구독권을 신청하면 주인장께서 제가 선택한 관심분야에 알맞은 책들을 골라준다. 대형 서점등에서 권하는 이달의, 혹은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 안에 들어있지 않은 독특한 책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그 첫 만남이 바로 <스토너>이다.
지독히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농과대학에 입학했던 그가 1학년 교양과목에서 들었던 영문학 강의로 자신의 진로를 바꾼다. 알아듣지 못하던 용어들이 가득했던 수업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줄 영혼의 등대들을 만난다. 글 속에서 발견한 빛들이 그를 이끌며 새로운 삶을 꿈꾸게 만든다. 졸업 후 농장으로 돌아와 늙어버린 부모님 대신 일을 해줄 거라 믿었던 그에게 진로를 듣고,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말에 어색한 정장차림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조용히 그의 인생 뒤안길과 같은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 부모님. 그는 마지막 순간 이때의 결정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경험해 보지 않는 순간들 속 흩어지는 그의 시간을 가만히 바라본다.
한 사람의 자서전과 같은 이 소설을 읽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특출 난 재능으로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삶에 또렷한 분기점이 있어 드라마틱한 반전이 생긴다거나, 사고를 통해 전에 없던 능력이 생긴다거나, 혹은 자녀가 자신을 대신해 무언가 큰 업적을 이룬다거나 등등.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정말 윌리엄 스토너 이 한 사람의 생애가 눈앞에 가만히 펼쳐지는데 웃자란 나무처럼 깡마른 그가 자신에게 입혀진 옷을 추스르며 살아가는 그 한 날, 한 날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건지 마지막 장을 덮다 가만히 먹먹해진 마음을 달래려 손으로 명치끝을 문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삶은 별 거 아닌 작은 조각들이 만들어 낸 커다란 만다라라고 생각한다.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무늬들을 우린 하루하루 앉아있는 자리에서 이어 붙이고 또 지워가며 그렇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믿는다. 완성된 문양은 우리 삶의 마지막 날에만 조감도로 만날 수 있는 그림이고 건듯 부는 바람에도 지워질 모래그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그림이 발끝에 차인다고, 또는 걷는 중에 방해가 된다고 결코 쉽게 지울 수 없다. 선 하나에도 흔적이 남는다. 그렇게 완성된 만다라가 문장으로 살아나 너울대며 내게 안겨든다.
세상 가장 평범하게 오늘 하루를 이겨낸 이들에게 주는 헌사 같은 이야기로 나를 위로하는 책, 스토너. 세상은 당신과 같은 평범한 이들이 이어가는 이야기로 채워지니 힘을 내라 말한다. 어린 날 꿈속에서 삼킨 진주가 책 속에서 보인다.
- 키이라 나이틀리 : Lost Stars
https://youtu.be/LSMCwLqaE_c?si=xk67k4Ojq9SHS-z_
#2023년모산미술관
#노대식작가
#DayDreamer
#소설스토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