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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신 Feb 16. 2022

日力

불안할 땐 주어진 하루만 생각하고 살아가자


 2012년 3월 대학에 입학해서 2019년 2월에 졸업을 했다. 학교를 다닌 만큼 휴학도 비슷하게 했다. 아프기도 했고, 그냥 쉬고 싶었다. 휴식이라는 게 방구석에 누워 유튜브-인스타그램-트위터-넷플릭스를 뫼비우스 띠처럼 보다가 잠드는 게 휴식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휴식은 어느 정도의 돈과 취향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취향이나 취미, 가치관이 없었다. 그리고 돈도 없었다. 가난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주중에는 12시부터 11시까지 주말에는 5시 30분부터 11시까지 일을 했다. 남는 시간에 우아한 취미를 갖고 싶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스무 살 이전까지 책 한 권 제대로 읽어 본 경험이 없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 다정한 제목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책 제목과 작가 소개에 ‘자유, 나답게, 주체적, 스스로, 소박한, 소소한’의 단어가 있으면 대체로 구매했다. 나를 소개할 때 쓰고 싶은 단어이면서 동경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는 사이 4학년이 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남들처럼 스펙을 쌓고 어디에 취업 할지 고민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일만 하기엔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큰 사람인지라, 학점관리와 대외 활동, 실습에 최선을 다 했다. 미래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4학년 2학기, 대부분 동기들은 실습했던 곳에 취업하기 위해 자기소개와 면접을 준비했다. 나 역시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준비했다. 채용이 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이 기관에 적합한 사람인지 드러내야 하는데 여전히 취업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우주는 갈팡질팡하는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살면서 처음 겪는 악재들이 연속으로 일어나 메리크리스마스도 해피뉴이어도 없이 2019년이 되었다.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은 점점 확고해지는데 취업해야 하니까, 후회할 수 있으니까, 졸업했으니까. 이유를 하나씩 늘어놓다 공황과 강박이 심해졌다. 사는 게 더 이상 기대 되지 않고 두렵기만 한다면 취업이 무슨 소용 있을까. 먼저 하기 싫은 취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포기하면 큰 일 날 줄 알았는데 당장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일이 있다면 답답했던 명치가 시원해졌다. 취업 계획으로 가득 찼던 달력이 깨끗해졌다. 모든 날이 온전히 내 시간이 되었다. 취업 다음으로 싫은 건 학교. 졸업식이 있는 주에 후쿠오카 티켓을 끊었다. 축하하고 싶은 날,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있고 싶었다.      


 후쿠오카는 22살 때 H언니와 처음 갔었다. 맛집, 유명한 장소, 대중교통 이용하는 법 등 아무런 사전 조사 없이 H언니 언니만 믿고 갔다. 작은 도시였기에 텐진에 있는 숙소를 기점으로 텐진 골목, 빈티지 거리, 텐진 지하상가, 나카스 강, 롯폰마쓰, 오호리 공원 모두 걸어 다녔다. 걷다가 배고프면 직장인이 많이 있는 가게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맛집 찾기에 성공했고 텐동, 라멘, 모쯔나베는 인생 음식이 되었다. 처음 가본 후쿠오카지만 모든 거리를 걸어 다녀 3일쯤 되니 내가 사는 동네 같았다. 우리는 돈이 없어 쇼핑 보다 구경을 많이 했다. 한국과 운전 좌석이 다른 일본 자동차,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면 나는 귀여운 새소리, 일본 사람들의 패션, 직장인들의 출퇴근 모습. 쇼핑센터보다 골목을 걷고 오호리 공원에 자주 갔다. 공원에는 큰 호수가 있고 중간에 작은 숲도 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나면 스타벅스 카페가 있다. 스타벅스에 들어가 아이스 카페라떼를 시켜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시자, 노곤했던 몸 속, 느리게 돌던 피가 활기차게 돌기 시작하며 절로 감탄이 나왔다. 배경음악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어우러져 백색소음 같이 편안했고, 창가에 들어오는 햇빛이 유독 좋았다. 아, 집냥이로 태어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길치, 방향치 그리고 지도까지 잘 못 읽는다. 혼자서 국내 여행 할 때 가고 싶은 곳이 있지만 길을 못 찾아 못 간적도 있다. 길 못 찾을 걱정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걱정을 했다. 


 월요일 오전 9시 55분 김해공항에서 출발해 11시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짐을 찾고 사람들을 따라 지하철까지 무사히 탔다. 호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하카타역에 내렸다. 구글 지도를 보니 하카타역에서 호텔까지 도보로 15분 택시로 3분이 걸렸다. 지도를 제대로 읽지 않고 느낌으로 찾다 하카타역 주변을 40분 동안 맴돌았다. 숙소를 헤맬 걸 예상했기에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았다. 결국 택시를 탔다. 기사님께 호텔 주소를 보여드리니 너무 가까워서 조금 흠칫하셨다. 기사님께서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구몬 일본어를 써먹을 기회가 왔다. 느릿느릿하게 ‘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일본 여행 기대가 됩니다.’ 한 마디 대답하고 나니 호텔에 도착했다. 기사님께서 580엔이 나왔다고 했다. ‘580엔은 한국 돈으로 5800원이니까 일본 돈으로 만 엔(원화로 약 10만원)을 내면 되겠다.’ 나는 내가 가진 지폐를 다 꺼낸 후 만 엔을 드리니 기사님께서 다시 내 손에 쥐어주시더니 천 엔을 가져가셨다. 그리고 거스름돈 420엔을 하나씩 주셨다. 기사님께서 순간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만 엔을 그대로 들고 갔을 텐데. 트렁크에 짐을 꺼내주신 후 내가 호텔에 들어갈 때 까지 손을 흔들어주셨다. 평소라면 수상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을 했겠지만 어리버리한 내가 걱정되기도 하고 여행이 재밌기를 바라는 마음 같았다. 방에 들어 와 짐을 풀어 놓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오코노미야키, 함박 스테이크 먹을 생각에 잔뜩 신났는데 내 길 찾기 능력은 흥을 따라오지 못했다. 두 군데를 연속해서 못 찾아 자신감과 당이 한껏 떨어졌다. 대충 눈에 보이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플랜C 텐진에 있는 스시로에 갔다. 지하철을 타고 텐진에 내렸다. 지하상가가 너무 넓어 출구부터 찾기 쉽지 않았다. 분명 지도가 나가라는 방향으로 갔는데 엉뚱한 방향이 나왔다. 후쿠오카 도착한지 4시간. 오기가 생겨 지도에 큰 건물들을 파악하며 느릿느릿 찾아갔다. 거의 도착 했을 때 빨간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쓰여 있는 스시로(スシロ) 간판이 보였다. 가타카나를 읽은 내가 대견했고 길을 찾은 내가 또 한 번 대견했다.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텐진 지하상가 구경 후 숙소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이번엔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렸지만 순조롭게 찾아가면 내가 아니다. 첫 날은 헤매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9시쯤 일어나 스트레칭하고 점심 쯤 숙소에 나왔다. 전 날보다 지도 보는 게 익숙했다. 낯선 도시가 익숙해지려면 걸어 보는 거다. 이틀, 사흘쯤 되니 지도 없이 숙소에 찾아갈 수 있었고 가고 싶은 장소도 느리지만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길 찾기와 가게에서 돈 내는 게 익숙해질 쯤 금요일이 되었다. 창문을 여니 비가 내렸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 비 오는 날은 뜨끈한 국물이니 캐널시티 라멘 스타디움에 갔다. 라멘 스타디움까지만 정하고 어떤 가게에서 무슨 메뉴를 먹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님 없으면 퇴출당하는 맛집 중에 맛집만 모인 곳이니 어딜 가든 맛있을 것 같아 사람이 덜 붐비는 가게로 갔다. 라멘이 나온 후 입은 쉴 새 없이 면과 국물을 흡입했다. 배불리 먹고 나오니 비가 개었다. 하늘과 공기는 맑고 날씨는 포근했다. 역시 비 온 후 하늘은 언제나 옳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오호리 공원으로 갔다. 겨우 두 번째 방문인데 어릴 적 살던 동네 공원에 온 것 마냥 반가웠다. 벤치에 앉아 조깅 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친구와 수다 떨며 가는 사람, 강아지 산책 시키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일본인, 한국인, 외국인. 반짝이는 호수, 바람이 불면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비 맞고 나서 한층 더 색이 짙어진 나무들, 대화 소리를 구경했다.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일주일 전까지 불안으로 죽을 것 같았는데 죽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괜찮아 보였다. 길치, 방향치인 내가 5일 만에 목적지까지 잘 찾아가는 사람이 됐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목적지가 없으면 또 어때. 천천히 걸었기에 발견한 것들이 많았으니까. 걷다 보면 가고 싶은 곳이 생길 수도 있다. 방향 감각, 지도 보는 감각이 없어 목적지까지 분명 헤맬 거다. 헤매면 또 어때. 헤매면서 찾는 감각을 터득하겠지. 그러니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순간을 만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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