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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Jul 10. 2017

내가 나인걸 견딜 수가 없는 오늘

지랄발광 17세 The Edge of Seventeen(2016)

씩씩 대는 호흡과 바쁜 발걸음. 교실문을 박차고 들어온 한 소녀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급하게 내뱉는다.


저 자살할 거예요


열일곱 소녀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필드)은 이제 정말 막바지에 몰렸다. 해결책은 죽는 것 밖에 없을 것 같다. 근데 진짜 죽기는 좀 그렇잖은가. 아마 못죽을테다. 그래도 내가 죽고 싶어한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좀 알아주어야 겠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이렇게 괴로우면 너무 억울하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바로 브루너 선생님(우디 해럴슨)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의 반응이 좀 의외다. 한가롭게 점심 시간의 여유를 즐기던 선생님은 자세 한 번 고쳐앉지 않고 대꾸한다. "그것 참 굉장한 얘기구나, 네이딘.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사실 나도 막 내 유서를 쓰던 참이었거든."


여기서 정지, 플래시백이 필요하다. 우리의 주인공 네이딘에게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이야기는 조금 오래전으로 돌아간다. 톰과 모나 부부 사이엔 아들, 딸이 한명씩 있다. 아들 데리언(블레이크 제너)은 어려서부터 키도 크고 잘생기고 똑똑해서 언제나 인기 만점이었다. 엄마 모나 눈에 그런 아들은 대견하기 짝이 없다. 반면 딸 네이딘은 일곱 살 꼬마 때부터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대놓고 오빠를 편애하는 엄마와도 사사건건 대적한다. 그 나이에 벌써 인생은 불공평한 게임임을 깨달았다. 그나마 아빠가 곁에 있어 줬다. 아빠만은 네이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빠마저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네이딘의 곁을 떠나버린다.


이제 진짜 네이딘 곁에 남은 사람은 단 한 명이다. 괴로웠던 일곱 살 시절 처음 만나 10년째 절친 사이를 유지해오고 있는 동네 친구 크리스타(헤일리 루 리차드슨)다. 네이딘에겐 정말 그녀만이 유일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 날벼락,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오빠 데리언이 크리스타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는거다! 내게 없는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 감히 나의 유일한 크리스타까지 훔쳐가려는 오빠를 용서할 수가 없다. 크리스타에게도 서운해 미칠 것 같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내 사정, 내 마음, 세상에서 네가 제일 잘 알면서.


출처 : 다음 영화


여기서 더 최악일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있더라. 화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네이딘은 속풀이 삼아 짝사랑해왔던 닉에게 온갖 야한 말이 가득 담긴 페이스북 메시지를 쓴다. 그런데 아뿔싸, send 버튼을 눌러버리고 만 것이다. 빌어먹을 손가락! 이 일을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이대로 그냥 공기 중으로 증발해버리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하나님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그게 저를 살리는 길입니다.




<지랄발광 17세>의 네이딘은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게 너무 괴롭다. 내가 나라는 게 도무지 감당이 안된다. 이렇게 태어나 버린 게 억울하고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엄마가 집을 비운 날, 난장을 벌이며 놀던 네이딘은 잔뜩 취해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해대며 크리스타에게 말한다.


난 왜 이 모양이지?
넌 왜 날 좋아해? 머리가 좀 이상한 거 아냐?
나도 내가 싫어.
어제 음성메시지 남긴 걸 들었는데 부처님이 와도 못견딜 것 같더라.
내 얼굴도 싫어.
말하거나 껌 씹을 땐 정말 끔찍해.
앞으로 내가 절대 껌 못씹게 말려줘.
가장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어.
이 얼굴로 평생 살아야 하잖아.


네이딘은 극악한 사춘기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자존감은 바닥, 세상은 불만투성이다. 세상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내 자신이다. 나는 정말 끔찍한 존재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런 기분이 들었어.
저 위에 둥둥 떠서 내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기분.
정말 싫었어. 내 행동거지랑 말투.
어떻게 하면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어.
평생 이런 감정만 느끼며 살까봐 너무 무서워.


늘 되바라진 얼굴로 틱틱대던 네이딘이 유일하게 눈물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는 진심이다. 갑갑한 상황을 핑계삼아 온갖 미운 짓을 해대는 네이딘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굳이 10대 사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네이딘같은 면모가 남아 있다. 내가 미워 죽겠는 그런 날들이,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곤 한다, 간혹 혹은 자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일, 인간관계, 세월, 모든 게 나를 작아지게 한다. 모르고 살면 더 좋을,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한끼, 그곳, 그 시간들이 막을 도리 없이 연결되어버린 인터넷을 통해 나에게 흘러들어온다. 반면 나의 하루엔 아무런 성과가 없다. 사소한 것 하나 잘해내지 못한 '그날의 나'들만이 다이어리를 빼곡히 메우고 있다. 사춘기를 남들보다 덤덤하게 보낸 나는 어쩌면 요즈음이 더 네이딘같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책을 읽는데 별 쓰잘데 없는 편지 구절에 조금 위안을 받았다.


나는 지금 제일 비참한 사람이라네. 내 기분을 인류 전체에 똑같이 분배한다면, 지구상에는 즐거운 사람이 한 명도 없을거야.


1958년 상원의원 선거에 또 한번 낙선한 링컨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그러니까, 링컨 대통령님조차 이렇게 네이딘스러운 기분에 빠져 땅굴을 파던 날이 있었던 거다. 그래, 나만 그런게 아니야.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독기가 잔뜩올라 미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 <지랄발광 17세>는 바로 이 부분에서 가장 매력적인 영화다. 다시 브 선생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항상 잔뜩 흥분해 달려오는 네이딘과 달리 브루 선생님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시끄럽게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네이딘을 앞에 두고 자동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어 일부러 드르르르 소음을 내는 선생님의 태연자약함은 얄밉기 그지없다. 한껏 약이 오른 네이딘이 선생님은 대머리에 연봉도 낮은 루저라 결혼을 못한거다 폭언을 퍼부어대도 선생님은 눈만 껌뻑이며 가만히 듣고 있는다. 그러다 초코 쿠키 조각을 반으로 똑 부수더니 한쪽을 네이딘에게 내민다. 네이딘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게 뭐냐, 왜 주는거냐 묻는다.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 기분 좋아지라고. 그거 아니. 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란다.


여전히 고저없는 담담한 목소리다. 조금 감동하려던 네이딘이 정말 제가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학생이에요, 묻자 역시 무심한 목소리로 답한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네이딘이 일이 생길 때마다 브 선생님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상하게 브루 선생님을 만나면 잔뜩 올랐던 열이 잠시나마 가라앉는다. 선생님은 네이딘의 끔찍함을 질책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다정하게 위로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냥 빵을 베어물며, 책을 읽으며 내버려둔다. 실컷 못나게 굴렴. 제 풀에 지치면 결국 네 자리로 돌아올테지.


언뜻 무책임한 방관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토록 무심하게 구는데도 네이딘이 자꾸 선생님을 찾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끔찍한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둬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영화 중 브 선생님이 가장 진지하게 분위기 잡고 하는 말이란 게 이거다. "Get out of the car." 다만 이 말만 하면 너무 야박하니 한마디 덧붙인다. "See you Monday."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이 덧붙이는 한마디가 중요하다. 선생님은 네이딘이 엉망진창으로 헤매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그리하여 또다시 월요일에 얼굴을 마주할 것임을 믿어주는 사람이다.




인생은 참 엉망이다. 가끔은 내 인생이 특별하게 엉망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원래가 살짝 비관적인 사람이라 결국 모두의 인생이 엉망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엉망이어서 참 공평하네요, 하기엔 어차피 내가 엉망인건 마찬가지라 딱히 감사하고 싶진 않다.


이 엉망진창인 인생에서 나는 평생 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 숨이 턱 막혀온다. 괴로운 일이다. 나는 앞으로도 자주 이 세상의 우울을 다 짊어진 것처럼 재수없게 굴 것이다. 남의 인생이야 어쨌든 지금 당장 내 하루가 엉망인게 온 우주 통틀어 가장 끔찍한 재앙이니까. 때마침 브 선생님처럼 맘껏 못나게 굴어봐, 대신 See you Monday,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참 감사하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브루노 선생이 되어주는 걸테다. 그러니 이토록 내가 미운 날엔 날 좀 방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내가 제자리로 돌아갈 거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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