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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사진관 Mar 19. 2019

신입사원때 여행떠나기

<키워드>신입사원, 휴가  


상사에게 예쁨 받는 신입사원이 되는 것. 상상만으로 달콤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눈총'의 길을 선택했다. 모범 신입사원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건 내 삶이었다.


120번째 자기소개서, 두 번의 면접 끝에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 철교를 지나는데 눈물이 났다. 아. 이제 꽃길만 펼쳐지겟구나. 간사하게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굳건히 닫힌 다음 장의 문을 겨우 열면 또 다른 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신입사원의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흘렀다. 야속하게도 적응 속도는 흐르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았다.

명함을 주고받는 일, 아웃룩 계정으로 메일을 보내는 일 따위의,'업무'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 내겐 크나큰 장애물이었다. 회사로 걸려온 전화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는 방법이 손에 익지 않아 상사 몰래 내 자리의 전화선을 뽑아버리기도 했다.(사실 그 뒤론 아침에 1시간 씩일찍와 연습을 하기도 했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엔 '왜 일을 미리미리 처리하지 못하고 야근을 하지?'같은 철 없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인간은 닥치고 부딪히고 경험해봐야 깨닫는 어리석은 존재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시스템에 차차 익숙해졌다. 여느 회사원처럼 기계적으로 결과물을 생산하는 하루가 일상이 됐다.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마주 앉은  사람들을 보는데 하나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가슴속에 사표를 숨기고 즐거움 같은 건 버리기로 작정한 걸까?, 나도 저런 무리 중 하나로 보일까?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일'로만 삶을 채워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일,

내게 영감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영을 해볼까? 어렸을 때 물에 빠진 기억 떄문에 생긴 '물 공포증'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림을 끄적여볼까? 회사에서도 종일 앉아 있는데 여가 시간에도 줄창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대학 시절 취미로 즐겼던 사진이 생각 났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출퇴근길을 '놀이 시간'으로 썼다.

그러다 떠오르는 것이 바로 여행.

대학생 땐 돈이 없어서 못 떠났다.

직장인이 되니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었다. 

핑계를 대고 있는 나 자산이 한심했다. 

한 달에 한번씩 '무조건'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입사원'이라는 '휴가 세계'의 불가촉천민에겐 더더욱.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합법적으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모든 날을 셈해봤다. 

한 달만근 후 나오는 월차, 포상 휴가, 여름휴가, 공휴일 그조차 없는 달엔 이틀의 주말, 

떠날 수 있는 모든 날에 비행기와 기차, 버스와 자동차에 몸을 싣고 다녔다.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금요일 밤 10시 비행기를 예약해놓고 '뜻 밖의 야근' 때문에 비행기를 취소한 적도 있고,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메일을 보내거나 보고서를 수정하는 일은 양반에 속한다. 기껏 떠난 낯선 도시에서 관광보다는 숙소 근처 카페에 들어가 일을 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해 월요일 새벽에 도착하는 항공 편을 예약하면  마치 꼭 짠 것처럼 운항이 지였됐다. 그럴 땐 '엄마'보다 '회사'에 먼저 전화해 상사하게  말해야했다. 

한 달에 한 번 피곤하고 지쳐도 꼬박꼬박 여행을 떠나는 내게 주변사람들은 '본전'생각이 안 나는지 묻는다. 

물론 상사의 따가운 눈총을 감수하며, 값비싼 경비를 치르고 고작 사나흘 안팍 떠나는 것이 비효율 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겐 낯선 공간이 주는 영감, 에너지가 몇 푼의 돈보다 더 값진 본전이다.

사실 '한달에 한 번'떠나느네 중요한건 돈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직위도 아니다.

별일 아닌 뜻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 여유있는 마음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어릴 때 돈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막내 주제에 꼬박꼬박 휴가를 챙겨도 될까 따위를 걱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치러야 할 게 무엇이든 기꺼이 치르고 싶었다. 일주일에 5일은 일을 잘 하는 직장인 그리고 이틀은 나를 위해 열심히 즐기는 사람 내가 빨간 날마다 기꺼이 '비행'을 일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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