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선생님들께
만년필과 노트를 선물 받았습니다. 만년필은 대나무숲을 닮은 잉크와 함께 있고, 진갈색의 가죽노트에는 좋아하는 문구가 새겨 있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도 크지만, 잠시 선물을 준비한 이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그이의 슬거운 마음은 함께하는 순간을 평화로 이끌어 줍니다.
만년필과 노트는 선물한 이를 닮았습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만년필이라 손잡이를 쥘 때 딱딱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겉보기보다 꽤 부드럽습니다. 그만큼 부드럽게 써지는데다 잉크 색도 참 맘에 드는 숲빛입니다.만년필 속까지 슬거운 마음이 꽉 차 있는 것 같았지요.
잉크에는 ‘竹林’이라는 정갈한 두 개의 한자가 나란히 붙어있습니다. 竹林, 대나무숲. 노트에 가만가만 써보며 읊어보니 마치 제게 대나무 숲처럼 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표준에 의지하지 말고 단단하게 자기의 나무를 지키라는 말 같았어요.
자기의 나무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숲으로 향합니다. 초롱꽃과 작약에는 여름의 명랑함이 담겨 있습니다. 숲은 아직 봄의 흔적이 남아 있고요. 숲이 전하는 말에 고요히 귀 기울이면 새, 바람, 삼나무, 봄의 가지, 청솔모, 사각사각 만년필 소리… 숲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말을 건넵니다. “평화롭게, 진실되게.”
평화롭고 진실되게 산다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윤리이고 태도이기도 하지요. 늘 희망을 가지고 온전히 사랑할 때, 함께 살아가는 모든 것과 ‘평화롭게,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기의 나무를 지킨다는 것은, 평화와 진실이 머무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 태도는 결국 모든 것의 목적지인 사랑으로 향할 테고요.
만년필 한 자루와 노트 한권이 주는 의미는, 삶의 풍경을 깊이 즐기게 합니다. 하지만 한 존재의 깊이에서 삶의 법칙을 알고, 그 필연성을 다시 삶에 적용하는 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의 과정은 우리를 삶으로 나아가게 해 주겠지요.
새 만년필도 제 손에 맞춰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같은 만년필이라도 쓰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매일의 깊이를 써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 꼭 맞는 만년필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겠지요.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노트를 물들여 가는 숲빛 잉크를 바라보며 "평화롭게, 진실되게."를 읊조릴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