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선생님들께
오랜만에 달디단 낮잠을 잤습니다. 잠시 꿈을 꾸었는데, 평화로운 들판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어요. 잠에서 깨어 보니 맑고 투명한 햇빛이 저를 비춥니다. 이 평화를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만년필을 잡습니다. 얼마 전, 여러 색상의 잉크를 선물 받았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은 ‘심록(深綠)’입니다. 짙은 녹색의 잉크는 하얀 종이에 눈부신 신록(新綠)을 그려냅니다. 펜촉에 잉크를 묻히는 순간부터 종이 위에 번질 신록을 상상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작은 나뭇잎 하나를 그릴 때도 싱싱한 새 잎을 상상하게 되지요.
잉크 하나가 주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름을 알아도 실제로 어떤 색이 펼쳐질지는 모릅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어 번지는 시간이 있어야 진짜 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저 이름에 기대어 색을 짐작할 뿐입니다.
펜촉에 잉크를 묻히는 순간부터는 결과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떤 색이 나오든 종이 위에 함께 머무르면 되니까요. 머무는 것에 집중하면, 온전히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에 대한 집착을 키우게 됩니다. 집착은 결과를 기대하게 하지요. 하나의 대상에도 수많은 기대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 없이 그 대상을 바라본다면, 있는 그대로 그것과 함께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그것과 함께 머무르며,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고, 눈앞의 대상과 함께 있습니다. 이 말 없는 지혜를,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축복을 온전히 만끽해 보세요. 하나가 되어 보세요. 평화란, 찾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함께 머무는 거니까요.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