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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31. 2019

연애소설

한 바닥 소설집

햇살이 버스 창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산등성이가 희끗했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 짙은 회색 하늘에서 눈은 굵게 내렸다. 도장을 찍듯 꾹꾹 분명히 땅 위에 발을 딛었던 눈은 그러나  반나절도 되지 않아 물웅덩이만 남겼다. 그래도 꼭대기의 눈은 아직 남아있었다. 굵고 얇은 나무 가지들이 이파리를 붙잡고 있었다. 노랗고 붉은 잎이 몇 개 남아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투명했다. 하얀 색도 회색도 아닌 투명한 출렁임이 유리창을 메꿨다. 망막 위로 검은 점 같은 그림자가 부유했다. 재하는 눈을 감았다. 검은 원은 감긴 눈꺼풀 안에서 선을 그렸다. 


“커튼 좀 칠게요.” 


서울과 경기도를 오고 가는 광역버스의 낮은 한가했다. 배차간격이 긴 탓에 이용하는 승객이 드문 버스 안에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은 한 명과 버스 중간, 나란히 앉은 두 명이 전부였다. 재하는 팔을 뻗어 금사가 섞여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색이 꽃 그림을 그리고 있는 커튼을 이쪽으로 잡아끌었다. 커튼 봉 위의 고리가 얽혀 있는지 커튼은 한 번에 창문을 다 가리지 못하고 반쯤 오다 멈췄다. 그러자 창문 옆 자리에 앉은 이서가 반쯤 일어서서 고리를 하나씩 순서대로 배열했다. 전에는 하얀색이었을, 누렇게 바랜 커튼이 창문을 가렸다. 재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속을 떠돌던 둥그런 도넛 모양의 점들이 사라졌다. 

종아리 부근이 뜨거웠다. 히터가 들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커튼이 보였다. 아니, 버스 유리창에 뺨을 대고 있느라 머리를 커튼 속으로 밀어 넣은 이서가 있었다. 재하는 커튼 속, 가려진 이서의 표정이 궁금했다.   


“혹시, 멀미해요?”


노랗고 하얀빛이 이서의 어깨쯤부터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릎 위로 떨어지는 빛을 향해 손을 펼쳤다. 빛 물. 이서가 중얼거리며 양 손을 둥글게 모았다. 이서의 손 그릇 안으로 빛 물이 떨어졌다.  


“아깝잖아요. 겨울 햇살이.”


재하는 이서가 모은 빛 무리가 날아가지 않게 덮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올리는 순간 빛은 그림자 속으로 모두 사라져 버릴 터였다. 재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노랗고 하얀 점들이 떠다녔다. 겨울 햇살의 조각들이 망막 안으로 들어왔다. 눈 밑의 살갗이 따끔거리다 이내 뜨거워졌다. 뜨거워진 무리가 가슴께까지 내려왔다.  


“겨울이 왔구나, 하는 때가 있어요. 코가 먼저 빨개져요. 웃기죠? 전생에 루돌프였나?”


이서의 농담이 좋았다. 단어와 이어지는 단어가 그리는 그림이 좋았다. 코가 빨간 이서, 루돌프의 빨간 코.   


“유독 코가 시려요. 귀마개, 털장갑 같은 건 있어도 코마개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햇살을 모아서 코에 갖다 대요. 그럼 코부터 따뜻해져요. 겨울 숨 같은 거예요. 깊게 마시면 지난 계절이 모두 몸으로 들어와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모두 있거든요. 자, 올해 처음은 먼저 양보할게요.”


이서는 모아 쥔 손을 재하의 코에 갖다 댔다. 호흡기를 단 것 같았다. 재하는 깊이 들이마셨다. 햇볕에 파삭하게 익어가는 봄 잔디 향이 났다. 다시 들이쉬자, 물기를 가득 품은 오이 풋내와 붉은 복숭아의 단내가 섞였다. 그다음엔 짙고 푸른 낙엽의 향이 차갑게 돌았다. 재하는 문득, 겨울 햇살을 아깝다 여기는 이와 함께라면 사는 동안 내내 겨울일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이번엔 내가 모아 볼게요.”


재하는 이서를 따라 햇볕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았다. 자아, 이서의 작은 손이 재하에게로 가까이 와 겹쳐졌다. 방금 마신 햇살보다 따뜻했다. 




불투명한 하늘 사이로 빛이 보였다. 구름과 구름 더미 너머에 감춰진 태양이 보고 싶었다. 계절의 한기를 느낄 때면 햇살이 그리웠다. 그림자가 사라진 보도블록에 서서 재하는 위를 올려다봤다. 흐린 날이 연이틀 계속되고 있었다. 막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같은 시린 기운이 스웨터 속으로 파고드는 날들. 재하는 코트 호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곧이어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재하는 이서를 떠올렸다. 이서의 손, 이서의 말투, 이서의 웃음, 이서의 표정. 이런 날 빛 물은 어디에서 모으는지, 어딘가에서 겨울 숨을 쉬고 있을지, 재하는 놓쳐버린 이서의 손이 보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내 손을 기억해. 어떤 느낌이었는지, 깍지를 꼈을 때랑 맞잡았을 때랑 어떻게 다른지. 자 봐, 내 엄지는 짧고 끝이 뭉툭해. 검지는 유난히 손톱이 둥글게 생겼어. 가운데 손가락은 첫마디가 굵고, 네 번째는 평범해, 나처럼. 나는 약지가 제일 마음에 들어. 제법 길고 튀어나온 마디도 없고 손톱도 매끈하거든. 왼손이랑 오른손이 비슷하지만, 나는 오른쪽 손가락이 더 얇아. 이상하지, 다른 사람들은 왼쪽 손가락이 더 얇다는데. 자, 이제 기억할 수 있겠어?


이서는 손이 작은 편이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갖고 싶었는데, 그건 약지에만 해당되는 얘기였다고 했다. 이서는 가끔 이면지 위에 자신의 손을 대고 그렸다. 재하는 이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그렸다. 재하의 엄지 두 번째 마디 사이쯤, 이서의 손톱이 있었다.  


피아노 칠 때, 선생님이 내 손가락에 대해 말을 했어. ‘1번 손가락은 건반을 힘 있게 누를 수 있겠구나. 재주 많은 손이란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알았던 것 같아. 내가 첫 번째 손가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아노를 칠 때마다 검지 아래로 엄지손가락을 감췄거든. 


나는 네 엄지손가락이 좋아. 오늘은 이렇게 잡고 있고, 기억은 내일 할게. 


재하는 이서의 엄지손가락을 잡았다.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는 이서의 둥근 손가락. 


나도 그래. 


오늘 기억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내일 다시 잡을 테니까.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 재하의 기억에 남은 것은 이서의 손이 아니라, 이서의 손에 관한 이서의 이야기다. 이서의 손, 햇살을 모으던 이서의 작은 손. 기억나는 것은 이서의 손이 아니라, 종이컵에 그려진 손과 책에서 읽은 손의 이미지다. 이서의 손은 사라졌다.  


종신형을 받아서 감옥에 간 연인에게 여자는 자신의 손을 그려 보내. 바람에 살랑이면 당신에게 손을 흔드는 거라고. 재하야, 나도 손을 남기고 싶어. 뒷모습 말고 손을 보면 나인걸 알아채 줘. 


이서는 엄지손가락이 당당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했다. 어디서나 앞에서 보이게. 다른 네 손가락 아래 감춰뒀던 엄지가 맨 앞에 선 순간, 스케치 연필을 잡았을 때라고 했다. 이서는 가끔 재하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때마다 재하도 앞장선 이서의 엄지를 응시했다.


재하야, 나를 똑바로 봐. 웃지 말고. 입을 잘 모아. 


이서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고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재하의 자세를 바로 잡았다. 재하는 이서를 바로 바라봤다. 이서의 눈은 이서가 웃을 때 같이 웃었다. 뭔가에 집중하면 앞으로 쭉 내미는 입술과 동그란 콧방울. 이서의 표정, 이서의 목소리. 재하는 잊지 않기 위해 이서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이서가 했던 말의 단어를 조합하면서 머릿속으로 이서의 음절, 이서의 음성을 배열했다. 자주 쉼표가 들어가는 이서의 말투. 재하야, 나는, 그리고 침묵. 겨울이 좋아. 나는 그리고 겨울 사이의 침묵 동안 이서의 머릿속엔 어떤 그림이 그려졌을까, 재하는 종종 이서의 뒤통수를 봤다.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서의 까만 눈과 닮은 뒤통수. 


계절을 한 번씩 함께 보냈다. 겨울과 봄,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던 날, 이서는 사라졌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마음이 매일 자신을 짓누른다고 고백했다. 


마음에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아. 이게 뭔지 모르겠어. 재하야, 너는 좋은 사람이지만, 위험한 사람이기도 해. 네가 옆에 있으면 내가 무너져. 나는 점점 더 숨을 쉴 수가 없어.  


재하는 이서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놓쳐버린 이서의 손, 잡을 수 없는 이서의 손가락. 재하의 입 안에는 뱉지 않은 말이 조각 난 사탕 알처럼 굴러다녔다. 실은, 나도, 재하는 오도독. 조각을 씹어, 이서야, 이 감정을 계속 둘 수가 없어. 삼켰다.


버스가 도착했다. 출근 시간의 광역 버스 안에는 빈자리가 드물었다. 재하는 통로 중간 오른쪽 자리에서 멈췄다.  

“고속도로 진입합니다. 안전벨트 착용해 주세요.”


운전기사의 말에 서둘러 빈자리에 앉았다. 검은색 백팩을 발치에 내려놓다 보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짧고 둥근 엄지. 놓았지만 놓고 싶지 않았던 손. 커튼을 덮고 있는 어깨. 겨울이었고, 햇살이 차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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