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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Nov 04. 2019

이모

한 바닥 소설집

이모는 골초였다.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이모의 입은 담배를 물고 있지 않을 때 보다 후우, 하얗고 긴 연기를 피워낼 때가 더 많았다.

그 시절 나는 가끔 이모의 담배 심부름을 하곤 했었다. 항상 열려 있는 미닫이문의 문턱을 넘어가며 팔팔 하나 주세요, 하고 가게 아줌마에게 천 원짜리를 내밀고 나서 아줌마가 알루미늄 책상 서랍 아래에서 담배를 찾는 동안 책상 위에 놓인 알사탕이나 쫄쫄이 처럼 자잘한 군것질 거리들을 하나 둘 눈으로 골랐다. 아줌마는 담배 한 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로 잔돈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것은 단골끼리의 언어였다. 아줌마는 내가 신중하고 사려 깊게 사탕과 쫄쫄이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을 기다려줬다. 나는 늘 거스름돈 이상의 군것질을 산 적은 없었으므로 보통 눈깔사탕 정도로 쇼핑이 끝나곤 했다. 그리고 이모 역시 내가 담배를 사다 줄 때 잔돈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그것도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암묵적 약속 같은 것이어서, 이모는 담뱃값에 딱 맞는 돈을 쥐어 보낸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더 쥐어 준 적도 없었다. 그래도 뭐랄까, 연말 상여금이나 인센티브를 받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이모가 담배를 두 갑 사 오라고 하면 나는 더 이상 사탕과 쫄쫄이 사이에서 번민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 날은 호주머니 가득 눈깔사탕과 쫄쫄이를 챙겨 집에 돌아왔다. 그런 대가가 충분한 거래였음에도 이모의 담배 심부름은 좀 부끄러웠다. 한낮에 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사는 것. 내가 만든 마음이었는지 누군가 만들어서 알려준 마음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낮에 담배 심부름은 뭔가 온당치 못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가게는 오래된 느티나무 옆의 2층 양옥집의 1층에 있었고 가장 오래되고 큰 느티나무 아래엔 평상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쭈뼛쭈뼛 인사를 해야 하는 마을 어른들은 가게에서 나오는 내 손도 유심히 봤다. 콩나물이나 두부 같은 게 들려 있지 않고 팔팔 한 갑을 들고 나올 때면 손이 뒤로 숨었다. 그래서 이모의 담배 심부름을 할 땐 호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고, 가게에서 나올 땐 사탕을 입에 물었다.

가게에서 파는 줄무늬 알사탕을 우리는 눈깔사탕이라고 불렀다. 입안에 넣으면 한쪽 볼이 빵빵해질 만큼 크기가 컸다. 겉면에 굵은 설탕 조각이 잔뜩 붙어 있었는데 입안에서 사탕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양쪽 볼 벽에 설탕 자국을 내는 기분으로 지그시 사탕을 누르면 설탕 조각과 사탕 표면 사이에서 단물이 나왔다. 그 시절 나는 아빠의 담배 심부름도 했는데, 아빠는 거스름 돈을 주지 않았다. 얼마 남았냐? 다 알면서도 묻는 아빠는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동전을 하나씩 세서 도로 아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도 아빠의 담배 심부름은 싫지 않았다. 일요일 낮에 아빠의 담배를 사서 가게 문을 나설 때면 약간 젠체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빠가 있어, 우리 아빠.


그도 그럴 것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우리 아빠였고, 검은색 가죽 서류가방을 든 사람도 우리 아빠였고, 일요일에 서점을 가는 동네사람이 우리 아빠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모는 우리 집 건너 집에 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이모의 집은 예뻤다. 침대도 있었고, 식탁도 있었다. 이모는 반찬을 꼭 그릇에 담아 내 왔고, 하얀 레이스가 달린 배게와 빨간 꽃을 수놓은 이불을 썼다. 나는 이모네 가는 걸 좋아했다. 반듯하게 펴진 침구 위에 뒹굴 거리다 건너편에서 이모가 피우는 담배 연기를 세었다. 이모는 구름을 만들거나 뻐끔거리지 않았다. 깊게 마시고 후우, 처음에는 긴 연기가 나왔고 뒤로 갈수록 하얀 길은 짧아졌다. 이모랑 담배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 이모 침대에 거꾸로 누워서 뒤집어진 이모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이모랑 살고 있는 그 남자도 정말 이모랑 어울리지 않아. 그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이모는 담배를 두 갑 샀다. 그리고 마주 앉아 담배를 피웠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모네 신발장 위에 담배를 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계절이 한 번 지나고 가게에 갔을 때, 그때는 엄마 심부름으로 콩나물을 사러 간 거였는데 가게 아줌마가 물었다.

  ‘이제 그 치 느이 이모네 안 오니?’

그 치가 그 남자를 가리키는지 몰랐으므로 나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조강지처 버리고 뭐하는 짓인가 했더니. 하여간 혼자 사는 여자들이......’

아줌마는 거기까지만 하고 말을 멈췄다. 나는 그때까지도 이모가 혼자 산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모는 누군가와 살고 있었다. 남자 친구였다가 이모부가 되었다가, 혹은 그 이모부 말고 다른 이모부가 있었다. 이모는 젊었고 예뻤는데, 더 어릴 적에는 더 예뻤다고 엄마가 그랬다. 그래서 그 년이 팔자가. 엄마도 거기까지만 하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며칠 후,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나는 건너 편 방에서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안 그럼 우리가 이사 가야지, 동네 창피하게. 집에 들어올 때마다 뒤통수가 후끈거린다고!”

“아니, 그게 우리 미경이 잘못이에요?”

“내가 이래서......”

“이래서 뭐요? 뭐? 걔가 뭐 우리한테 돈을 빌려달라 했어요, 돈을 떼먹었어요? 당신이 뭘 해준 게 있다고 그래요?”


이모는 한 달쯤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 나는 이모가 가는 게 싫었다. 눈깔사탕도 아쉬웠다. 뽀송뽀송한 이모의 침대가 그리웠다. 그릇마다 깔끔하게 덜어서 반찬을 차려 주는 이모의 밥상도 생각났다. 습기를 먹어 눅진한 이불을 덮을 때마다, 반찬통 째 먹는 올려 두고 먹는 밥상 앞에서 나는 이모를 생각했다. 아빠의 담배 냄새가 짙게 밴 옷걸이를 지날 때에도 이모 생각을 했다. 붉은 입술 밖으로 나오던 이모의 담배 연기. 이상하게도 이모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파마머리를 높게 묶어 올리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딸깍,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이던 이모. 나는 가끔 이모 침대에 누워 이모와 같이 뒹굴면서 이모의 젖가슴을 누르며 장난을 쳤는데, 그때 이모에게서 장미향의 바디로션 냄새를 맡았다.

이모는 이사 가기 전 날 나를 불러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오천 원을 더 쥐어줬다.


“그 집에 있는 눈깔사탕 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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