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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an 31. 2020

우유 배달 추리 일지

되는대로 소설

우유 배달 추리 일지 #1.


아침마다 현관문 고리에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 있다. 담겨 있는 것은 흰 바탕에 보라색 프린팅으로 '소화가 잘 되는 우유'라고 쓰인 200미리 흰 우유. 대체 누구지? 나는 흰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다. 뭘 탄 건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수취인이 보낸 우유를 먹지 않고 모아 둔 지 한 달이 되었다. 언제고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현관문 앞에 지키고 서 기다렸다가 그 누군가를 만날 용기도 없었다. 나는 혼자 살고 있다. 내가 혼자 살고 있단 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경비아저씨가 다 일터. 매달 반찬을 가져다주는 외할머니가 있긴 하지만 그는 내가 의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외할머니는 어떤 의무, 당신 딸에 대한 책무를 갖고 내게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이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 딸, 그러므로 뭘 해도 어떤 말을 듣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15일 이면 어김없이 들러 냉장고 안에 멸치 볶음, 콩자반, 오징어채 같은 밑반찬을 대 여섯 개 채워 놓고 갔다.  그것 외에도 할머니가 하는 일은 현관 앞에 남자 구두를 내놓고, 베란다 빨래대에 남자 옷이며 속옷을 걸어 두는 게 있었다. 이 집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고, 베란다 창문 저편 누군가에게 증명해 보이는 일. 그런 발자국을 내가 오기 전까지 남긴 후 사라졌다. 할머니가 다녀가셨군. 문쪽을 향해 가지런히 앞코를 내밀고 있는 짙은 갈색 구두를 신발장 구석으로 처박았다. 이런다고 없는 집이 있는 집 되나. 나는 베란다에 걸린 누구 것 일지도 모를 남자 옷과 속옷을 걷어 쓰레기통에 처 박는다. 나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다음 달 15일에도 할머니는 올 것이고, 그것은 엄마 역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단 말과도 같아서, 할머니 발자국이 남아있는 동안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받게 된 우유 때문에 나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할머니, 저예요.

- 웬일이냐, 네가.


건조한 말투는 할머니였고, 그것은 또한 할머니가 그랬을 리 없다는 마치 여권에 찍히는 출입국 관리소의 도장 같은 그런 것이었다. 당신의 목적지 그대로, 오차 없이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것. 언젠가 사회주의 국가로 여행을 갔는데, 돌아가는 비행기 표 없이는 출입국 심사가 거부된단 말을 들어서인지 짙은 쑥색 제복의 붉은 완장을 찬 직원이 내 여권과 출력한 비행기 E 티켓을 한참 들여다볼 때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그때 심장을 간질였던 초조함이 벨이 울리는 동안 내내 가슴께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웬일이냐, 네가' 하는 할머니 대꾸는 출입국 직원이 찍은 도장 같았다. 통과, 해브 어 나이스 트립. 가슴 졸일 일 없이. 예상 밖 일은 일어나지 않아. 혹시나 했던 마음이 자리를 찾았다. 그럴 리 없었던 것의 그럴 리 없음.  


- 그냥 했어요.


할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나도 뭘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오늘로 서른한 개가 된 우유갑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계단식 아파트 앞 집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나는 우유를 앞집에 슬그머니 걸어둘까 하다 두 개도 아니고 하나란 생각에 다시 집으로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면지를 꺼내 '우유 금지' 라 쓰고 현관문 앞에 붙여두었다. 그래도 너무 매정한가. 혼자 사는 애를 불쌍히 여긴 누군가가 베푼 자비일 수도 있으니 싶어 다시 나가 '우유 금지' 아래 작은 글씨로 '저는 흰 우유 안 먹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렇게 쓰고 나니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졌다. 우유는 그대로 있을까? 아니면 다른 게 놓여있을까? 받다 보니 당연해진 마음이 다른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인생에 이벤트가 필요해.


우유 배달 추리 일지 #2.


쪽지를 붙이고 아침이 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현관 문고리에 무엇이 걸려있을까? 궁금해서 잠을 못 이루었다면 극적이겠지만 사실 잘 잤다.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가 다른 나라로 떠났던 밤에도 잘 잤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어디서든 잘 자는 아이라서 두고 갈 결심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엄마 옷깃을 손에 쥐고 자는 아이였더라면 엄마는 이곳에 남았을까? 모르겠다. 4년을 만난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나는 맥주 두 캔을 마시고 꿈도 없이 잤다. 아빠 장례식장에서도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검은 상복을 입고 방석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게 지금껏 나를 키운 힘이라고 믿는다. 언제든 어떤 상황이든 잘 자는 것도 능력이라고, 피부 비결까지는 모르겠지만 자는 동안 세상 근심을 묻어두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지금 기억나는 건, 딱 한 번. 이국 땅에서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잠을 설쳤다. 시차가 8시간이나 나는 곳에서, 엄마는 자신의 시간에 맞춰 이곳 시각으로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는 어떠냐고, 할머니는 다녀가냐고 묻고는 금방 끊었다. 학교와 할머니 말고 우리 사이에 더 확인할 것이 있었다면 좀 더 긴 통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고 그것은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열 달 외에 우리가 이어져 있었던 시간은 존재하는지, 내게 남은 기억에는 없는 시간들을 엄마는 갖고 있는지 그것만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현관 문고리가 궁금했다. 우유가 있을까? 없을까? 무례하다고 침을 뱉고 갈 사람은 아닐 거야. 한 달 소리 없이 우유만 두고 갔잖아. 그 사람의 자비심에 기대 보자. 답례라도 할 걸 그랬나. 백 가지 생각을 하며 차가운 손잡이를 돌렸다. 머리만 내밀고 확인한 바깥 문고리에는 검은 봉지가 걸려 있었다.  안에는 우유 대신 쪽지가 들어 있었다.


'아침 맥주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뭘 모르는 사람이군. 우유보다는 맥주지. 검은 봉지를 갖고 들어오려다 그대로 남겨두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초록색 알루미늄 캔 맥주를 출근길에 봉지 안에 넣었다.


'건배!'



우유 배달 추리 일지 #3.


꽉 찬 지하철이 토해내듯 사람을 뱉어낸다. 땅 밑으로 한참, 이 동네에서 저 동네를 거쳐 오는 동안 보는 건 사람들뿐이다. 검은 터널과 하얀 불빛, 그리고 짙은 색 외투 속 사람들, 그들은 누구도 눈을 들어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각자 화면 속 사람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제안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제안서 하나를 두고 김대리와 저울질시킨 박 부장도 짜증 나지만 마감이 두 건이나 있다고 먼저 선수 친 김대리도 얄밉다. 하지만 제일 못난 것은 나다. 타이밍 계산하느라 말 못 한 무능한 나나나. 생각을 길어 올리려 고개를 아래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다 앞자리 사람이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드라마에 눈이 갔다. 번화한 거리 한 복판에서 여자와 남자가 싸우고 있었다. 좌판을 엎고 던지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악다구니가 짐작되는 동작이 화면에서 쏟아졌다. 아는 배우들이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싸우는 것인지, 극 중에 둘은 연인 아니었나, 그런데 저렇게 끝을 낼 것처럼 싸우다니, 드라마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내려야 할 역이다. 집에 가면 저 드라마를 찾아봐야겠다, 아쉬운 마음으로 역에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나는 저렇게 싸워본 적 있었나.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아주 많지만, 실은 고작 하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행한 착한 척 때문이었다. 나빠 본 적 없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는 그 말을 좋아한다고 했고, 대체 왜 그 말을 좋아하는지 고민해 보지 않은 채 무작정 그를 따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마지막이랄 것도 없이, '연락할게', '그래'를 끝으로 일 년이 지났다. 사랑은 세상 속으로 익사해버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오면서 나는 조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익사하고 싶진 않아. 그건 사랑이 아니었겠지.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고양이처럼 다가와 갸르릉 거리며 비빈 것 이상은 아니었을 거야. 마을 버스정류장 근처 동물병원 불빛이 꺼졌다. 강백호 동물병원. '야간 진료 화목'이라 쓴 간판에만 불이 들어왔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서 어제 먹다 남은 피자와 함께 내일의 제안서는 잊고 아까 보려던 드라마를 찾아보는 나를 상상하며 마을버스 계단을 내려섰다. 회사에서는 무능했고, 연애도 그럭저럭이었지만 저녁 메뉴와 맥주만큼은 내 뜻대로 고를 수 있지.   

문 연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반짝이는 편의점 안에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섰다. 4캔에 9천800원이지만 흔들리지 말자. 저녁 메뉴와 맥주만큼은 내 뜻과 통장 잔고에 따라 고를 수 있지. 초록색 알루미늄 캔 맥주 네 개를 집어 들었다. 맥주 네 개가 들어가면 딱 맞는 편의점 장바구니에 붉은 별 네 개가 빛났다.


- 그거, 싱겁지 않아요? 이게 더 맛있던데, 전.


어디서 나타난 오지라퍼인가. 고개를 돌려 보니 강백호 동물 병원 수의사가 '퇴근길 IPA' 맥주를 들고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지금 퇴근하시나 봐요.

- 오늘은 진료가 일찍 끝나는 날이어서요.  그 고양이는 잘 살고 있어요.


지난여름,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흰색 SUV 차바퀴 안 쪽에서 새끼 고양이가 야옹야옹 울고 있었다. 어떻게 꺼내야 하나 차 주인과 한참 애를 먹던 때 경비아저씨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수의사를 불러왔다. 처음에 수의사는 장갑을 낀 채로 고양이를 꺼냈는데, 사람 체취가 붙으면 어미가 찾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리저리 고양이를 만져보더니 피부병과 영양상태로 봤을 때 어머가 두고 간 모양이라고 했다.

'입양을 하거나, 아니면 이대로 두거나. 유기동물로 신고하면 안락사죠.'

왜 울었니? 고양이에게 묻고 싶었다. 나는 울지 않아서 살았는데. 말하지 않고 울지 않아서, 엄마가 나를 이곳에 두고 간 것임을, 그건 할머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손이 가지 않고, 저러다 죽어도 모를 애.

울어서, 나타나서 여러 사람에게 곤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아이가 나였고, 새끼 고양이는 그렇지 않았다.

강백호 동물 병원 수의사는 고양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피부병 치료를 해서 어딘가에 입양되기를 바라야겠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말하는 고양이는 그때 그 고양이였다.


- 입양됐나요?

- 네. 병원에 들르는 분이 데려가셨어요. 잘 울어서, 잘 됐죠.

- 울어서 잘 되는 일도 있군요.

- 이것도 마셔봐요. 세 캔에 9800원이에요.


'퇴근길 IPA'가 내 가방에 들어왔다. 부르주아 구만.    

그리고 아침 현관 앞에 걸어 둔 검은 비닐봉지는 사라졌다. 맥주와 함께! 심장이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다. 퇴근길 IPA를 마시고 자야겠다.


우유 배달 추리 일지 #4.


이벤트는 끝났다. 우유를 계속 잠자코 받을 일이었나 싶다. 며칠 째 현관문 고리에는 무엇도 걸려 있지 않다. 건배를 외쳤으나 반사가 돌아온 것 같은 이 허무함과 무안함이란. 어쩌면 그는 자신의 무엇이 거절당해서 먼저 무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유를 급식 외에 먹어 본 적 없었다. 흰 우유를 못 먹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여섯 살 때였나 할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갔는데, 목욕을 마치고 나와 빛바랜 핑크색 수건으로 몸을 둘둘 감싼 채 흰 우유를 마시는 내 또래 여자애를 넋 놓고 바라봤다. 아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자애의 엄마를 넋 놓고 봤다. 입가에 우유를 묻힌 아이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은 내가 동화책에서 읽고 영화에서 봤던 엄마들이 갖고 있는 눈빛을 떠올리게 했고, 그때부터 흰 우유를 마실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없으니까, 흰 우유를 마시려면 저런 엄마를 곁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단단한 씨앗처럼 마음에 박혔다. 갖지 못한 삶에 대한 질투를 엄한데 분풀이하는 꼴이었지만, 여섯 살짜리가 할 수 있는 복수는 그런 것 말고 없었다. 그러니까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그냥 먹을걸 그랬나, 그랬다면 나에게도 엄마가 생겼을지 모르지.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호의, 소공녀가 고된 하루를 끝내고 초라한 다락방으로 올라왔을 때 근사하게 차려진 식탁과 불빛을 마주하는 그런 이벤트를 얼마간은 더 마주했을지도. 후회는 남지만 그렇다고 달리 뒤집을 도리도 없다. 이 일기는 오늘로 끝을 내야 하나, 할 때 초인종이 울렸다.

혼자 산 지 오래되고 나서 초인종이 울리면 보통 일 이분 후 외시경을 들여다본다. 외시경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우유갑 사건 이후로 나의 호기심은 무럭무럭 자라나 나는 소신껏 문을 열었다. 바스락 거리는 비닐봉지 소리가 났다. 문고리에 걸려 있는 것은 무엇? 차가운 김이 느껴지는 알루미늄 캔, 맥주였다.


‘하루를 마감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기도 하네요. 치얼스!’


비닐봉지 안에는 ‘퇴근길 IPA’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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