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기울이면, 그때의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서 잔잔히 들려온다. 선창가에서는 통발과 그물을 손질하느라 바쁜 남자들, 다라이를 이고 분주히 오가던 아낙네들, 모시 적삼에 흰 수염을 곱게 기른 할아버지, 갯바위에서 따개비를 따며 놀던 아이들까지, 바다는 언제나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오시기배(정치망 어선)가 들어와 짠내음이 퍼진 선창가는 새벽부터 삶이 요동치는 현장이었다. 수협에 고기를 넘기고 배가 들어오면, 남은 생선을 사러 모여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침을 열었다. 시장이 따로 없던 마을의 선창가는 곧 시장이었고 마을의 심장이었다. 장화 발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렸고, 생계의 냄새와 땀의 냄새가 뒤섞인 곳, 바다는 곧 삶의 터전이었다. 그 모든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마음에 켜켜이 쌓인다. 나는 오늘도 천천히 그 기억의 문을 열고, 조용히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아주 어릴 적 헤어졌던 사촌 오빠가 손에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들고 시골로 찾아왔다. 부산에서 친구와 함께, 헤어진 가족을 찾아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물어 물어 온 것이다. 그 종이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기 혹시 정○○ 댁 맞습니까?”
낯선 남자 둘이 남새밭 옆 쪽문으로 들어왔고, 엄마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래, 니는 어디서 왔노?”
“부산에서 왔어예. 제 아버지가 정○○입니다.”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사촌오빠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울음 속에는 반가움과 그리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듯한 안도감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도 잃어버린 손자를 품에 안아 반가워하셨다.
삼촌은 먼바다로 나갔다 돌아오지 못했고, 숙모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나가 친척들과 생이별을 했다. 그래서일까, 오빠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그날의 햇살은 유난히 따뜻했다. 하얀 피부에 노래 잘하던 오빠는 “지금부터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누구누구, 한 곡 부르겠습니다!”라며 익살을 부렸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며, 방 한가운데 둘러앉아 노래를 불렀다. 오빠가 알려준 ‘편지’라는 노래는 왠지 슬펐지만, 노랫소리는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겨울이면 엄마가 부드러운 쌀 뻥튀기를 한가득 튀겨 놓았다. 우리는 한 주먹씩 입안으로 밀어 넣고 오물거렸다. 그러다 누가 웃음보따리라도 풀면, 입안에서 팝콘처럼 터져 나온 뻥튀기가 온 방 안으로 흩어져버리곤 했다. 뜨끈한 아랫목에 모여 앉아 고구마를 먹으며 게임을 했다. 군불이 타오르는 작은방에서의 행복은 세상 무엇보다 따뜻했다. 여름엔 미숫가루를 동네 방앗간에서 고소하게 빻아와, 얼음을 둥둥 띄운 대접에 한가득 부어 마셨다. 그렇게 방학이면 사촌오빠가 찾아와, 우리 집은 아이들 웃음으로 늘 북적였다.
우리 집은 신작로 아래에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기억 속에는 마을에 상여가 자주 지나갔다. 상여꽃이 흔들리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 아래 사거리에서 마지막 제를 올리면 어른들은 “어이어이 어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며 슬픈 상여가를 불렀다. 어린 나는 그 상여꽃이 무서웠다. 어른들이 부르는 그 소리는 슬프고 낯설었다. 어쩌면 나는 조금 일찍 삶의 무게를 느낀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상여가 지나가던 날, 할아버지는 남새밭 끝에 앉아 곰방대에 봉초 담배를 넣어 피우셨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천천히 흩어졌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한숨 속엔 세월과 이별을 견뎌온 삶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예절에 매우 엄격하셨다.
“여자는 치마를 입을 땐 다리를 곱게 모으고 앉아야 한다. 양반다리도 하면 안 된다. 다리를 쭉 뻗고 앉지도 말아라. 방에 어른이 계시면 드러눕지도 말아라."
철없는 나는 그런 말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었다. 그래서 제법 말대꾸를 많이 하던 아이였다.
“할아버지, 앞으로는 여자도 남자처럼 평등한 시대가 올 거예요.”
쫑알거리던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곧 회초리를 드셨다.
그리곤 어김없이 싸리나무 회초리가 내 종아리를 스쳤다.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았다. 무릎 위에 앉아 긴 수염을 만지며 놀곤 했다.
하루는 고모집 사촌들이 놀러 왔는데, 할아버지가 숨겨둔 오다마 사탕(왕사탕)을 그들에게만 건네주셨다. 나는 질투가 나서, 할아버지가 예쁘게 매만져 놓은 회초리 세 개를 몰래 분질러 버렸다. 바람 쐬고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가 고운 싸리나무 몇 가지를 골라 꺾어 오셨다. “이건 예쁘게 세워두자.” 그 후로 할아버지의 회초리는 다시 곧고 단단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가끔, 나에게도 오다마 사탕을 꺼내주셨다.
시골은 자연에서 나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이 간식이 지면 돈을 지불하고 사 먹는 과자는 특별했다. 뽀빠이, 자야 같은 과자를 사 먹고, 오래 물고 사탕 자랑을 할 수 있는 오다마 사탕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마루에 걸터앉거나 대문 앞 대추나무 아래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세상을 바라보셨다. 엄마는 매일 그 한복에 달린 동전을 새로 갈아주었다. 물을 한 모금 머금고 푸-우 불며 다림질을 하고, 하얀 천으로 싸서 꼭꼭 밟아 풀을 먹였다. 사시사철 할아버지는 한복을 입으셨다. 하얀 버선 위, 발목에 곱게 묶은 분홍빛 대님은 단순한 끈이 아니라, 가족을 지켜낸 단정한 마음의 상징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부락(마을) 친구들 얼굴이 여럿 스쳐 지나간다. 친구들은 아버지 일을 도와 덴마(거룻배)를 타고 노를 젓던 이들, 선창에서 그물을 손질하거나, 쉬는 날이면 밭일을 일꾼처럼 거들던 이들이었다. 이제는 황혼을 바라보며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창원에서, 그리고 멀리 해외 남태평양 바다에서 —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지만, 명절이 되면 남해로 모여 둘러앉는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웃음과 사투리, 바다 냄새는 그대로다. 마치 낡은 고무신처럼, 엿장수에게 바꿔온 호박엿처럼, 빛바랜 흑백사진의 향기가 마음 깊이 스며든다.
그중 한 친구는 강남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본사가 종로로 옮겨오면서, 우연히 앞뒤 건물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 서울 한복판에서 같은 하늘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 새삼 기적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깡촌에서 광화문까지 출세했다”라고 웃었지만,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 같다. 매번 부서지고 닳아가면서도 제 자리를 지킨다. 그 버팀이야말로 삶의 용기다. 바람에 흔들려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 마음, 그 단단함이 결국 신념이 된다. 신념은 부모가 물려주는 것도, 책으로 배우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부딪히고 겪으며 깨닫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사소한 바람에도 모두 힘들어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으려 한다. 내가 무너지면, 한순간 도미노처럼 누군가도 함께 쓰러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깡’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우리 고향에서는 '깡다구'라고 불렀다.
기죽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
고집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며 묵묵히 견디는 사람.
요즘 세상에 가장 필요한 태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어릴 때 자주 외우던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살아갈 때는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다.
신념 있는 패기로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에게 마음으로 응원을 보낸다.
이렇게 내 기억 속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사촌 오빠, 엄마, 할아버지, 스쳐간 바닷가 마을의 얼굴들, 그리고 스물네 명의 동네 친구들. 그들의 목소리와 손길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바다는 지금도 푸르고, 바람은 여전히 남새밭을 스쳐간다. 나는 그 사람들을 기억하며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