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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스 Dec 11. 2023

필사하는 마음

#02 내가 나를 견뎌야 할 때

  최근에 나는 네일아트에 관심이 생겼다. 네일아트라 함은 손톱에 매니큐어와 반짝이는 큐빅을 박아 넣는 디자인을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손끝을 예쁘게 다듬는 것이다. 요즘 나는 예쁜 언니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손톱이 예쁜 사람들을 보면 괜시리 부러웠다. 내 손은 유달리 작은 편인데다 가늘지만 말 그대로 ‘손’으로서의 기능으로만 관리해서 큐티클은 물론이요, 번잡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손톱 끝이 바짝 깎여 있다. 가끔 운동을 하다 우연히 손끝을 만지작거리면 거스러미들이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심지어 오른쪽 중지 손톱은 시계반대방향으로 조금 돌아가 있다. 필사 때문이다.      


  필사는 ‘책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일’을 말한다. 필사의 역사라함은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한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즐겨 읽었던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라는 소설 속에도 필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 주요 인물인 김윤식은 동생의 이름을 빌려 남장을 한 채 생계를 이어나가는 여성이다. 그녀의 본명은 김윤희. 뛰어난 학문과 왕성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으나 당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학문을 하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당연히 여성은 학문을 활용한 경제 활동을 할 수도 없다. 때문에 그녀는 남장을 하는 것을 택한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버리자 그녀가 해낼 수 있는 노동의 허용 범위가 한층 넓어진다.      


  남인 출신 집안에 가장을 맡고 있던 그녀는 필사를 통해 아픈 동생의 약값을 대고, 고리대금을 애써 불평하지 않으며 빚을 갚아나간다. 어느 날은 필사보다 몇 배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거벽 일은 물론이요, 성균관 유생들의 과제를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러다 노론의 중심에 있는 좌의정의 외동 아들이자, 조선에서 제일 가는 선비, 이선준의 눈에 띄게 된다. 물론 이선준은 김윤희가 자라온 환경과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자님의 가르침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외고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삶을, 몰락한 양반이자 남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융통성도 없다. 이선준은 김윤희의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고, 그는 그녀가 정당하게 성균관에 입성해 나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물론 그녀가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윤희는 그런 억울한 마음을 어디에도 표출하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야말로 어떻게 현생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경중을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배출 욕구가 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이 책 속의 인물들은 선량하기 그지없어 화를 담담히 참기만 한다. 나 역시 그런 마음들을 담아 필사를 했다. 펜 끝에 힘을 잔뜩 주고, 하얀 노트에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썼다. 마음을 누르듯 어디에도 밝히고 싶지 않은 무수한 감정을 참아왔다.      


  매일 아침 눈 뜨고 일어나 출근 전까지 글을 쓰거나 읽는 시간을 보냈다. 주로 새벽 여섯 시에서 여덟 시 사이인데, 비가 오는 날에는 컨디션이 좋아 네 시에 저절로 눈이 떠지기도 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비 오는 날에만 맡아지는 물비린내를 좋아했고, 추적추적 창문을 때리고 흙바닥을 적시는 소리를 좋아했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에 비가 오는 날에만 착 가라앉아지는 정서를 즐겼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잔잔하고 차분한 사람들. 수많은 생각주머니가 머릿속에 달려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친구가 되고 싶어지지. 함께 있으면 마음을 촉촉하게 감싸주는 사람들이 있지. 운동을 마치고 잠깐 책을 읽다 이부자리에 누우면 나는 자주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거나 그런 일들에 대해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글로 옮겨 적었다. 잠깐의 틈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수도꼭지처럼 문장이 자꾸만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며칠이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속상한 마음에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우는 날도 있다. 그럴 때에도 필사를 했다. 내 글이 아닌 남의 글을 베끼는 일.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노트에 쓰고, 또 썼다. 소리내어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른 아침에는 그럴 수 없으므로 주로 밤에는 책을 소리내어 읽거나 내가 쓴 글을 소리내어 읽기도 한다. 누군가의 글을 필사하다보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시시한 문장도 있고, 마음을 툭툭 건드리다 못해 훔치고 달아나는 문장도 있다. 어떤 날에는 한 문단이 미치도록 좋아 결국 참지 못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한다. 분홍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박박 그어 놓고, 여기 너무 좋지 않니. 나만 이 감정을 느끼고 싶진 않아. 그렇게 작고 요란하게 몰래 소리를 지른다. 응어리진 마음이 저절로 풀리는 시간이다. 필사는 나에게 운동하는 방법을 배우기 전까지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14년 전부터 필사를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첫 번째 글 선생님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필사는 문장력과 글의 구성력을 키우는 데 탁월한 방법이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내게 글 쓰는 법을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필사하기 좋은 글을 구분하는 기준도 분명 있다. 최대한 문장이 짧고, 명료한 글을 따라쓰는 것을 권한다.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필사하는 편이 좋다. 나 역시 나만 꽁꽁 숨겨둔 채 주기적으로 필사를 하는 작품들이 꽤 있다. 필사를 하다보면 그 작가의 성정을 닮아가는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나와 비슷한 결의 작품을 사귀게 되는 것인지도. 작가와 작품이 늘 동일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작품과 친구가 되었다고 여긴다.      


  최근엔 김남숙 작가의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여러번 읽고 필사했다. 처음에 작가의 에세이가 나온다고 했을 때는 어렴풋이 그 작가가 쓴 소설집을 떠올리고는 잊어버렸는데 우연히 에세이를 이리저리 들추다 읽게된 작가의 글은 울먹이는 청포도 같다고 생각했다. 청포도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인데, 톡 터지는 맛을 느끼기 전까지는 밍숭맹숭할 것만 같다는 착각을 하기 쉬운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다소 이른 나이에 작가가 되어 버린 그녀를 오래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녀를 부러워하기만 했을 뿐, 이해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때로는 작가를 이해하는 행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장면에서 그 작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에 대해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하곤 한다. 내가 습작할 때, 한 장면을 그려낼 때마다 드는 마음들을 생각한다. 결코 감정 없이 소설을 쓸 순 없다. 늘 어딘가에 남들에게 들키고 싶은 나의 진실된 속내가 담겨 있다.      


  언젠가 내 글을 필사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속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순간을 기대한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내가 필사하는 것을 좋아하듯, 누군가가 내 글을 필사하는 때가 올까. 책상 앞에 앉아 곰곰이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다 이내 다시 노트를 편다. 그리고 옮겨적는다. 천천히, 느릿하게. 손 끝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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