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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스 Dec 25. 2023

산타짓 좀 하지마

#04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일 때

12월 24일은 나의 스물여덟번째 생일이었다.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버스데이다. 자정이 되자마자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고, 선물이 이어졌다. 카톡방에는 팡팡 터지는 이모티콘과 모션들이 줄줄이 뜨다 사라졌다. (심지어 눈도 내린다) 이번 생일엔 뭘하면 좋지. 범기념일적인 날이 생일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런 날엔 밖에 나가지 않는 편이 최선이라는 것을. 크리스마스이브엔 방 안에 이불을 덮어쓴 채 핫초코와 마가레뜨를 머리맡에 두고는 철지난 <데드풀>이나 보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원한다면 빌에반스의 재즈나 익숙한 멜로디의 캐럴을 흥얼거리는 것도 좋겠다.     


어릴 땐 유원지도 가고, 놀이공원도 갔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본 날도 있었지. 특별한 체험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해. 저녁이면 매년 케이크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나에겐 늘 선택권이 없었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엔 혈육의 회사에서 케이크가 배달되었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은 모두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으니까. 관심없는 척 했지만 묘하게 불만스러웠다. 부처가 태어날 땐 떡도 안지어 먹는데 하느님은 왜 꼭 케이크를 나눠 먹는 거지. 난 초코케익 말고 고구마케익 좋아하는데. 입술을 비죽였으나 딱히 표현하진 않았다. 그게 첫째의 특징이고, 크리스마스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니까.    


  연말이 되면 구세군 종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데엥, 데엥. 지하철 역사 안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에도, 심지어는 회사 출퇴근길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낸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냄비 앞으로 다가가 꼬깃하게 접어놓은 그것을 훅 집어넣는다. 이것은 내가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그저 혈육이 물려준 단순한 습관이다. 아무 의미 없는, 그다지 훈훈하지도 희생적이지도 않은 정신이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신을 믿는다. 불교를 믿고 싶을 땐 불교를 믿고, 기독교를 믿고 싶을 땐 기독교를 믿고,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을 땐…… 스스로를 믿어버린다. (주로 내가 그렇다) 이 오빠 저 오빠 좋아하는 잡덕처럼 종교 역시 이리저리 나 편한대로 둘러 믿는 편이지만 어딜가든 좋은 곳에 쓰이라고 모금을 한다.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일조한다는 것은, 돕는다는 것은 반드시 어딘가에 쓰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도울 때는 나의 마음을 돌려받지 않아야 한다. 살아오는 내내 나는 우리 가족에게서 그것을 배웠다. 신에 기대고 싶을 땐, 마음이 제법 흔들려 신을 믿고 싶어진다면 내가 신에게 무엇을 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고, 그저 나의 쓸모가 ‘좋은 곳으로 가라.’, ‘좋은 곳에 쓰이자’는 마음가짐만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힌두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하물며 길가에 버려진 돌이나 폐타이어를 믿든 상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이 ‘기적’이고 범신론적인 시선이자 태도라고 생각한다.     


  범신론적으로 ‘신’을 바라본 작자가 여기 또 있다. 바로 일본의 대표 현대소설가 엔도 슈사쿠다. 그의 작품은 종교적인 세계관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어쩐지 신의 신경을 살살 그슬리는 듯 발칙하고 도전적인 것 같다. 『깊은 강』에 등장하는 ‘미쓰코’는 작품을 떠나 개인적으로 내가 아끼는 캐릭터다. 왜냐하면 그녀의 성격이나 태도는 어느 면에선 나의 얄팍한 성정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사람을 이해받고 싶을 때, 혹은 나를 설명하고 싶을 때 이 작품을 꺼내보곤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읽는 독자의 성정 또한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요술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좋아한다. 한편 미쓰코는 작가만이 가진 종교와 신에 대한 독보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다. 엔도 슈사쿠는 살아오는 내내 문학을 통해 자꾸만 신에게 의문을 품었다. 그의 대표작 『침묵』 역시 ‘배교’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토록 사회가 혼란스러운데, 지구는 뜨겁게 들끓고 있는데 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깊은 강』에서의 미쓰코 역시 오쓰를 통해 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아껴왔던 아들이 당신을 배신했노라고, 내가 당신의 것을 가졌노라고. 참으로 도발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미쓰코라는 캐릭터가 재밌었다.       


  당대 일본 사회에서 여성은 보수적인 프레임에 갇혀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연약하고 가벼우며, 철저하게 무지한 존재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냘픈 미성만 질러댈 수 있는 존재. 생각의 깊이라곤 바닥에 떨어진 보석의 개수를 세는 것이 전부로 치부된 것 같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미쓰코라는 캐릭터도 그런 배경을 지니고 있다. 학부 시절 소위 잘나가는 퀸카이자 그녀에게 홀리지 않은 이성이 없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이런 재주까진 없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미션이 주어지는데, 바로 ‘오쓰’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것으로 소문난데다 마른 건초더미처럼 신학만 파고드는 학자 타입의 선비이기도 하다. 미쓰코는 그런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거나 사랑의 감정을 안다기보단 그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 곧 신을 이겨먹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무의미하고 멍청한 인간의 욕망이자 허영일지도 모르겠다.     


‘미쓰코’라는 캐릭터를 조금 뜯어보자면, 의미없는 일에 때로 목숨을 거는, 즉 평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자아존중감’은 낮은 인간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쓰코는 평생 오쓰가 지닌 신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 애쓴다. 애쓰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오쓰의 사랑, 즉 신에 대한 믿음은 결국 오쓰 자신의 신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쓰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큰 캐릭터다. 그러니 어떠한 시련이 주어지더라도 좌절하지 않는다. 순결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과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을 때에도, 프랑스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그는 믿음을 지켜낼 수 있는 곳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행한다. 그야말로 이것은 희생이다.     


  희생의 사전적 의미는 타의를 위해 자의를 버리는 삶을 뜻한다. 자의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자의는 곧 자기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허영을 갖는다. 무신론자로서 생각한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허영은 척박하고 불완전한 생을 흐린눈으로 직시하기 위해 주입한 환각은 아닐까. 우리는 너무도 인간이어서 허영이 필요하다. 오직 나만이 나를 위해 진심을 다해 희생할 수 있기에 어떤 순간에는 허영이 절실하다. 나는 때로 허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영은 자의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을 위해 자의를 버리는 것 또한 결국 ‘자아’를 존중하기 위한 허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희생 역시 허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오쓰의 허영은 신에 대한 믿음, 즉 희생인 것이다.      


  ‘신’이라는 거창하고, 번지르르한 말 따윈 지겹다는 미쓰코에게 오쓰는 말한다. 그럼 신을 신이 아니라 양파라 부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양파가 아니라 다른 단어를 써도 괜찮다고 그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행한다는 믿음을 실천하며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의 ‘행함’, 즉 희생을 받아주는 갠지스강에서 인간을 돌보고, 평온함으로 이끌어 나간다. 그는 신에게 무엇도 구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확인하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쓰와 미쓰코의 결정적 차이이자, 두 사람이 가진 허영의 본질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엔도 슈사쿠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통찰력이기도 하다.      


  최근에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사랑’이 희생에 가깝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때 우리가 모든 세월을 함께하지 못하고 결국 스쳐지나가야 하는 거라면 내게 지금 고통만 나눠주고, 행복하게 떠나가라는 말을 한 직후였다.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너를 기억하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나는 요즘 ‘사랑’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여기서 사랑은 단지 애인과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나 그 밖의 모든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나는 ‘사랑’은 물성이 아닌 관념이므로 결국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애’라는 개념조차 ‘자아’일 뿐 ‘애’라는 건 애초에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다니다 낭만주의자들과 사랑론자로부터 큰 코를 다치고 있는데)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 무엇도 구하지 않고, 그 무엇도 확인하려 하지 않을 때 가장 완성에 가까운 것.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지. 그래서 내게 사랑은 가짜 같고 허영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치 미쓰코가 불현 듯 오쓰를 찾아가 그를 통해 ‘진짜 사랑’을 확인하려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것은 산타 같은 마음. 몰래 찾아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헤집고 다니다 그림자 하나 들키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계산할 순 있어도 증명할 수 없는 태초의 이 ‘기적’같은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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